비오는 날 밤에 고등학생이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다가 신호위반 사고가 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병원에 지급한 요양급여를 다시 환수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A는 2022년 6월 30일 00:22쯤 오토바이를 운전해 안양시 동안구에 있는 도로를 지나던 중 교차로의 적색신호에 정지하지 않고 직진하다가 반대 방향에서 좌회전 신호에 따라 좌회전 중이던 차량의 보조석 앞 범퍼 부분을 들이받아 중골 골절 등의 상해를 입었다. 사고 당시 비가 내리고 있었고, A는 낮에는 학교에 다니며 저녁과 야간에 배달업무를 하다가 사고가 난 것이다. A는 이 사고로 6월 30일부터 11월 30일까지 5개월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위 병원에 요양급여비용 2,600여만원을 지급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그러나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3조의 신호 또는 지시위반의 중대한 과실로 교통사고가 발생하였고, 이는 국민건강보험법 53조 1항 1호에 따른 보험급여 제한 대상에 해당하므로, 결국 속임수나 그 밖의 부당한 방법으로 보험급여를 받은 것'이라는 이유로 요양급여비용 2,600여만원을 부당이득으로 징수하는 결정을 한 후 A에게 이를 고지, A가 소송(2023구합61530)을 냈다. 국민건강보험법 53조 1항 1호에서는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한 범죄행위에 그 원인이 있거나 고의로 사고를 일으킨 경우' 보험급여를 하지 아니한다고 규정, 급여를 제한하고 있다.
서울행정법원 제6부(재판장 이주영 부장판사)는 11월 3일 "부당이득금환수고지처분을 취소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교통사고가 원고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하여 발생하였다고는 단정하기 어려워 원고가 속임수나 그 밖의 부당한 방법으로 보험급여를 지급받았다고 볼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항소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됐다.
원고가 제출한 교통사고 CCTV 영상과 피해차량 블랙박스 영상에 의하면, 피해차량과 피해차량 옆 차선의 차량은 2022. 6. 30. 00:22:13쯤 좌회전을 시작했고, 원고는 00:22:18쯤 정지선을 넘어 교차로에 진입했다. 원고는 비교적 일정한 속도로 교차로에 진입했는데, 사고 당시 원고의 진행방향으로 선행하여 진행하는 차량은 없었고, 원고 옆 차선에도 다른 차량이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원고가 정지신호를 인식했다면 오히려 주변 차량의 존재를 살핀 후 빠르게 교차로를 지나가거나 좌회전하는 차량을 피해 차선을 변경했을 것인데, 그러한 사정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재판부는 "사고 당시에는 야간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고 지적하고, "피해차량 블랙박스 영상에 의하면 피해차량의 경우 와이퍼가 작동하는 사이에도 차량 전면 유리에 빗방울이 수시로 떨어져 맺히고 도로에 물이 고이는 등 강수량이 적지 않았던 사실을 알 수 있는바, 원고가 착용한 헬멧 페이스쉴드에도 빗방울이 맺혀 시야 확보에 어려움이 있었을 가능성도 높고, 그로 인해 시야가 가려짐으로써 원고가 불가피하게 신호를 보지 못하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원고는 당시 고등학생으로서, 낮에는 학교에 다니며 저녁 및 야간에 배달업무를 하는 상황에서 피로가 상당히 누적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높은바, 교통사고 당시 원고가 순간적인 집중력 저하나 판단착오로 신호를 위반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중대한 과실이라 함은 통상인에게 요구되는 정도의 상당한 주의를 하지 않더라도 약간의 주의만 하였다면 손쉽게 위법, 유해한 결과를 예견할 수가 있는 경우임에도 만연히 이를 간과한 경우처럼 거의 고의에 가까운 현저한 주의를 결여한 상태를 말한다"며 "달리 원고가 음주나 과속을 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사정도 없는 상황에서, 단지 신호를 위반하였다는 사정만으로 원고가 고의에 가깝도록 현저히 주의를 결여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 판례(2003. 2. 28. 선고 2002두12175 판결 등)는 "국민건강보험법은 국민의 질병 · 부상에 대한 예방 · 진단 · 치료 · 재활과 출산 · 사망 및 건강증진에 대하여 보험급여를 실시함으로써 국민보건 향상과 사회보장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며(제1조), 국민건강보험 제도는 국가공동체가 구성원인 국민에게 제공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안전망에 해당한다. 이러한 국민건강보험법의 입법 목적과 국민건강보험 제도의 특성을 고려하면, 국민건강보험급여 제한사유 중 '중대한 과실'이라는 요건은 되도록 엄격하게 해석 · 적용하여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김경남 변호사가 A를 대리했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