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외국변호사의 기술⑩ 칵테일 파티의 기술
[특별연재] 외국변호사의 기술⑩ 칵테일 파티의 기술
  • 기사출고 2023.06.12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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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던진다'는 생각으로 부담없이 임하면 편해"

미국 고객사의 한국 지사에서 회의를 하던 중 국내영업 담당자로부터 영어 스트레스에 대한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다. 미국 본사로 글로벌 영업전략 협의를 위해 출장을 갔었는데 각종 회의나 모임에서 각국 영업 담당자들은 서로 친근하게 웃고 떠들며 유창하게 영어를 하는데 영어에 자신이 없던 자신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소외된 채 잠자코 있었다고 했다. 그때 얼마나 스트레스가 컸는지 순간순간 자살 충동도 느꼈다고 했다.

◇은정 외국변호사
◇은정 외국변호사

그 정도까지는 물론 아니지만, 나도 25년 전인 1998년 우리 사무실(법무법인 김장리)에 외국변호사로 입사한 후 외국 고객들과 칵테일 파티 같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어렵게 느껴졌다.

저연차 어소 변호사일 때 당시 대표변호사님은 외국 고객사 임직원들과 영어로 대면 회의를 할 때 종종 나를 배석시켰다. 그런 회의를 하다 보면 한국변호사들과 외국인들 간에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가 있다. 그런 기미가 보일 때마다 내가 어색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서구적인 유머 감각과 가벼운 대화(small talk) 기술로 그 상황을 잘 넘기곤 했다. 함께 회의를 할 때마다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눈여겨보셨는지 3년차 때였던 2000년, 대표변호사님이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국제 변호사 컨퍼런스에 같이 가자고 했다.

그때까지 일본에 가본 적이 없어 설레는 마음으로 도쿄에 갔다. 컨퍼런스 참석자들의 면면을 보니 세계 각국의 쟁쟁한 로펌들의 대표변호사급, 시니어 파트너급 인사들이라 서열로 치자면 내가 거의 맨 아래였다. 좀 긴장이 되었다.

컨퍼런스 첫날 일정으로 칵테일 파티가 있었다. 칵테일 파티는 일반적인 회의와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나는 비록 미국 교포이긴 하지만 사고방식은 거의 토종이다. 주로 아는 사람들과 모여 앉아 부어라 마셔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한국식 회식 문화에 익숙했던 나는 예전부터 넓은 연회장을 돌아다니면서 대화 상대를 바꿔가며 다양한 소재로 대화를 나눠야 하는 미국식 칵테일 파티 문화가 어렵게 느껴졌다.

파티 초반에 와인잔을 들고 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럭저럭 잘 버티다가 주최 측인 일본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와 맞닥뜨렸다.

그 순간부터 내 칵테일 파티 흑역사가 시작되었다.

대화가 시작되자 일본변호사가 "일본은 전에 와 봤냐?", "전문분야가 뭐냐?"는 등 친근감 있게 영어로 이야기를 건넸다. 하지만 몇 분이 지나자 금세 대화의 소재가 고갈되어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그런 시간이 길어지자 나도 초조해졌고, 일본변호사도 "이게 뭐지?"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멀뚱멀뚱 서로 쳐다보며 어색한 의미 없는 대화가 몇 분 더 지속될 무렵 때마침 다른 변호사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자 일본변호사가 "Excuse me"라고 하면서 전광석화와 같이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떴다. 뭐랄까, 갑자기 어디에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그 순간 어색한 분위기에서 해방되었다는 안도감과 함께 내가 좀 더 세련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창피한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칵테일 파티는 한 시간 이상 이어져 계속 상대를 바꿔가며 대화를 해야 했다. "밥은 안 주나?"하는 생각에 배고프고 피곤했다. 그래도 직전에 일본변호사로부터 배운 '던지기' 기술을 즉석에서 활용해가며 이 사람 저 사람과 적당한 때 대화를 끊고 상대를 바꿔가며 이야기하니 한결 대처하기 편했다.

"아, 이렇게 하는 거구나"하는 감이 왔다.

영어에 능통해도 언어 능력이 아닌 내성적 성격으로 인해 칵테일 파티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심적으로 에너지 소모가 많아 기진맥진할 수 있다. 이것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한국인만 겪는 게 아니라 내성적 성격의 서구인들도 흔히 토로하는 문제라 우리가 너무 크게 스트레스를 받을 일은 아니다.

언제 대화를 끊고 대화 상대를 자연스럽게 바꿀지 타이밍을 잘 잡으면 요령 있게 대처할 수 있다. 어차피 칵테일 파티에서 친구를 새로 사귈 것도 아니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으로 고객관계가 맺어지기도 어려우니 서로 '던진다'는 생각으로 부담없이 임하면 편하다. 상대방도 나한테서 벗어나길 원하고 있을 수 있다.

지금은 능구렁이가 되어 상대방의 표정만 보아도 이 사람이 나한테 호감이나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바로 간파해 다른 사람한테 넘길 '던지기' 타이밍을 길게 잡을지 아니면 짧게 잡을지 쉽게 정할 수 있다.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더라도 시계를 보는 척하며 "Oh, Sorry, gotta(got to) go!"라고 말하고, 허공에 가차없이 던져버리면 된다.

은정 외국변호사(법무법인 김장리, jun@kimchangl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