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부터 시민 배심원이 유 · 무죄 판단
내년부터 시민 배심원이 유 · 무죄 판단
  • 기사출고 2007.12.1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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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사상 처음…기속력 없는 '권고적 효력' 한계 시민 참여, 재판부 배심 평결 존중이 성패 관건
12명 배심원들이 표결을 시작했다. 재판정의 분위기는 친아버지를 잔인하게 살해한 혐의로 법정에 선 18세 소년의 유죄를 예고하는 분위기였다. 11명의 배심원이 유죄라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배심원 1명이 무죄를 주장하고 나섰다. 무죄를 주장한 이 배심원은 흉기에 찔려 숨진 아버지의 상처 깊이와 소년의 키를 비교설명하며, 유죄를 인정할 수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들이댔다. 미국의 배심제에선 배심원 전원의 만장일치가 아닌 한 유죄판결을 내릴 수 없다. 실체적 진실을 떠나, 이 한 사람의 배심원이 하마터면 전기의자에 앉을 뻔한 미성년의 소년을 위험으로부터 구해낸 것이다. 미국의 배심제를 묘사한 영화 '12인의 노한 사람들(12 Angry Men)'의 한 장면이다.

◇배심재판으로 열린 모의재판에서 변호사가 배심원들을 상대로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사진제공=대법원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배심재판을 우리 형사법정에서도 볼 수 있게 됐다. 대법원은 내년 1월 1일부터 배심재판의 일종인 국민참여형사재판을 전국 18개 지방법원에서 실시한다.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배심제도가 2003년 10월 논의를 시작한 지 5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피고인과 같은 위치에 있는 동료 시민의 시각으로 피고인의 유 · 무죄를 판단함으로써 판결의 보다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게 국민참여재판의 가장 큰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임성근 법원행정처 형사정책심의관은 "국민참여재판은 국민의 형사사법 참여를 통해 국민주권을 실현시킨다는 의미가 있다"고 배심제 도입의 의의를 평가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도 "건국 이후 형사재판제도에서의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고 배심제 도입의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피고인이 원하는 중죄 사건이 대상

물론 배심재판은 피고인이 원해야 실시할 수 있다는 대전제가 붙는다. 피고인으로서는 배심원에 의한 재판을 받느냐, 종전처럼 직업 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느냐의 선택을 해야 한다. 또 모든 범죄가 배심제의 대상도 아니다. '국민의 형사재판 참여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배심재판은 ▲고의로 사망의 결과를 야기한 범죄 ▲강도 및 강간이 결합된 범죄 ▲강도 또는 강간에 치상 · 치사가 결합된 범죄 ▲일정 범위의 수뢰죄 등으로 범위가 엄격히 제한돼 있다. 대개 구속사건일 가능성이 높으며, 변호사가 없으면 개정할 수 없는 '필요적 변호' 사건이 대부분일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들 범죄에 대해 피고인이 배심재판을 신청하면 법원이 심사를 거쳐 배심제 실시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대법원은 시행 첫해인 내년의 경우 약 100~200건의 배심재판 시행을 예상하고 있다. 전국 18개 법원에서 나눠 실시되기 때문에 한 법원당 10건 남짓한 배심재판이 예상되고 있다. 이어 예산상의 뒷받침 등을 봐가며 차츰 늘려나간다는 게 대법원의 방침이다. 배심재판은 또 1심에서만 가능하며, 피고인이나 검사가 배심으로 진행된 1심 결과에 불복해 상소하면, 2심 · 3심은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직업 법관에 의한 재판으로 진행된다. 물론 배심재판의 결과가 2·3심에 가서 뒤바뀌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배심원 앞에서의 치열한 공방이 예상되는 국민참여재판은 여러 측면에서 많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피고인은 물론 재판부를 구성하는 법원과, 검찰, 변호사 모두 달라질 재판의 모습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종일 · 연일심리로 재판기관 단축될 듯

대법원에 따르면, 우선 종일재판과 연일재판 등 재판 진행의 모습이 종전과는 많이 달라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대법원의 한 관계자는 "배심원의 잦은 법정 출석 등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집중심리가 불가피하다"며, "충실한 공판준비를 거쳐 기일을 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기일에 증인 여러 명을 함께 불러 온 종일 재판을 진행하는 종일재판이 이루어 질 수도 있고, 한 번의 기일로 재판이 끝나지 않으면, 매일 재판을 진행하는 연일심리가 이뤄질 수도 있다는 게 이 관계자의 전언이다. 배심재판이 아닌 일반 사건의 형사재판은 2~3주 간격으로 기일을 넣어 진행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국민참여재판의 전체 재판기간은 일반 형사재판에 비해 오히려 줄어들 것이란 게 많은 법원 관계자들의 전망이다. 종일재판 · 연일재판 등 집중심리를 통해 신속한 판결 선고가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대법원은 배심재판의 성공적인 실시를 위해 전국 18개 지방법원에 배심제 운영을 위한 전담재판부를 구성했으며, 전용 법정도 새롭게 단장했다. 모의재판도 법원별로 이어지고 있다. 임성근 형사정책심의관은 "법관들을 미국에 보내 미국 배심재판을 벤치마킹 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해나가고 있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유죄를 입증해야 하는 검찰과 배심원을 설득해 무죄를 이끌어 내야 하는 변호사들도 더욱 바빠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검사와 변호사들은 구두변론을 통해 직접 배심원을 설득해야 할 필요성이 커져 이른바 '말 잘하는 검사' '화술 좋은 스타 변호사'가 대접받는 시대가 열릴 수도 있다. 이런 측면을 간파한 형사변호사들 중엔 내심 배심재판 도입을 반기며, 이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는 사람도 없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배심재판에선 아무래도 변호사 선임료가 올라갈 가능성이 높아 '유전무죄, 무전유죄' 시비가 더욱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배심재판은 피고인이 원하는 경우에만 실시할 수 있는데, 결국 '돈 있는 피고인'을 위한 배려 아니냐는 지적이 그것이다. 한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배심제 이용율은 전체 사건의 1~2%, 많아야 5% 내외라는 얘기도 있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대목은 차츰 활기를 띄어가고 있다는 국선변호제도의 활용이다. 임성근 심의관은 "피고인에게 국선변호인의 도움이 필요할 경우 일선 법원에서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국선전담변호사를 선임토록 할 것"이라며, "국선변호인제도를 잘 활용하면 유전무죄, 무전유죄 시비도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응답자 7할 “배심원 후보되면 출석할 것”

이처럼 배심제는 많은 변화가 예고되는 진일보한 재판제도로 평가받고 있지만, 성공리에 정착하기 위해선 넘어야 할 산 또한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국민의 자발적인 재판 참여를 통한 배심원의 원활한 구성이 담보돼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다. 대법원도 이 점을 가장 고민하고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배심원은 행정자치부가 법원 관할별로 제공한 약 1만 명의 명단에서 재판이 있을 때마다 무작위로 배심원 후보자를 뽑아 선정하게 된다. 성인이면 남녀노소나 직업 등에 따른 차별이 없으며, 70세 이상의 고령자는 면제를 요청할 수 있다. 먼저 전산 추첨을 실시해 배심원의 3~4배수 가량의 배심원 후보자를 선정하며, 이들 중에서 배심원을 확정해 배심원이 구성된다. 최근 실시한 한 설문조사에선 응답자의 70%가 배심원 후보자로 선정되면 출석하겠다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나 일단 순조로운 출발이 예상되나, 일반 시민들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가 요망된다는 게 법원 측의 입장이다.

배심원은 9명, 7명, 5명의 세 가지 형태 중 하나로 구성된다. 법정형이 사형과 무기징역인 사건은 9명, 그 외 사건은 7명으로 이루어진다. 피고인 또는 변호인이 공판준비절차에서 공소사실의 주요 내용을 인정한 때에는 5명의 배심원으로 배심이 구성된다. 또 배심원의 결원 등에 대비해 5명 이내의 예비 배심원을 둘 수 있으며, 이들은 재판이 끝날 때까지 대기하게 된다.

배심원의 구성 못지않게 국민참여재판의 성공적인 운영을 위해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는 대목은 배심원의 평결을 재판부가 얼마나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다. 국민참여형사재판에선 배심원의 평결이 재판부를 기속하지 못하고, 권고적 효력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 배심제는 미국의 배심재판과는 구별되며, 참심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재판원제도와도 다르다.

배심의 평결은 만장일치가 원칙이나, 만장일치가 안 되면 판사의 의견을 들어 다수결로 평결을 내린다. 또 양형에 대해서도 배심원들은 판사와 함께 토의한 후 의견을 제시하며, 양형 의견 또한 재판부를 기속하지 않는다.

글 김숙현 기자 l 사진제공=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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