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태평양전쟁에 강제동원된 한국인 전범 보상 문제는 한일청구권협정 대상 아니야"
[헌법] "태평양전쟁에 강제동원된 한국인 전범 보상 문제는 한일청구권협정 대상 아니야"
  • 기사출고 2021.09.03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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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한국 정부 상대 헌법소원 각하

태평양전쟁에 강제 징집되어 전범으로 처벌받은 한국인 피해자들의 전범 피해 보상 문제는 한일청구권협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8월 31일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포로감시원으로 강제동원되어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다가 종전 후 국제전범재판에 회부되어 비씨(BC)급 전범으로 처벌받은 한국인과 그 유족이 "한국 정부가 한국인 전범 피해에 대한 보상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며 외교부장관을 상대로 낸 헌법소원 사건(2014헌마888)에서 5대 4 의견으로 각하 결정했다. 법무법인 해마루가 청구인들을 대리했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기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군부는 대규모로 발생한 연합군 포로들을 수용 · 관리하기 위하여 1941년 12월 육군성에 '포로정보국'을 설치하여 이듬해 5월부터 한반도에서 한국인을 포로감시원으로 강제 모집했다. 그 결과 3,000여명의 한국인들이 포로감시원으로 강제동원되었고, 이들은 군무원의 신분임에도 부산에 있는 노구치(野口) 부대에 수용되어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고 동남아시아 각국에 산재되어 있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배치되었다. 한국인 포로감시원은 하급 군무원으로 일하면서 상관인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서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 · 통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A급 전범은 독일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일본의 도쿄 전범재판을 통하여 처벌받은 반면에, BC급 전범은 연합국인 미국, 영국, 네덜란드, 호주, 중국 등 해당 전범 피해자의 국가에서 이루어진 전범재판을 통하여 처벌되었다. 한국인 포로감시원들도 연합군 포로들을 학대하였다는 이유로 연합국 국가에서 실시된 국제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전범으로 인정되어 사형 또는 유기징역 등의 처벌을 받았고, 그 중 유기징역에 처한 한국인 BC급 전범들은 1950년 일본 스가모(巢鴨) 형무소로 이송되어 남은 형기까지 수감되거나 가석방되었다. 

청구인들은 "한국인 BC급 전범들이 일본에 대하여 가지는 배상청구권이 한일청구권협정(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의하여 소멸되었는지 여부에 관하여, 이미 소멸되었다고 보는 일본 정부와 소멸되지 않았다고 보는 한국 정부 간에는 위 청구권에 관한 해석상 분쟁이 존재하므로, 외교부가 위 협정 제3조가 정한 절차에 따라 해석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는데도 이를 전혀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다수의견)는 그러나 "일제강점기 한반도에서 살던 한국민들이 일본의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압제(壓制)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에서 한국인 BC급 전범들은 제대로 된 설명이나 교육도 받지 못한 채 포로감시원으로 강제동원되어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서 연합군 포로를 감시 · 감독하다가 국제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제대로 된 통역과 변호인 등을 제공받지  못한 채 처벌을 받은 안타까운 역사적 사실은 인정되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나 원폭피해자의 경우와는 달리, 한국인 BC급 전범들에게는 국제전범재판소의 재판을 통하여 BC급 전범으로 인정되어 처벌을 받은 특별한 피해가 존재하고, 이러한 국제전범재판소의 판결은 국제법적으로 유효하며 피청구인을 비롯한 국내의 국가기관이 존중하여야 한다"고 전제하고, "국제법적으로나 국내법적으로 유효하게 승인되는 국제전범재판소의 판결에 따른 처벌을 받아서 생긴 한국인 BC급 전범 피해 보상 문제는 처음부터 한일청구권협정의 대상이 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국제전범재판에 따른 처벌로 인한 피해와는 달리, 한국인 BC급 전범들이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인하여 입은 피해의 경우에는 일본의 책임과 관련하여 한일청구권협정의 해석에 관한 한 · 일 양국 간의 분쟁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지 여부가 불투명하다"며 "그렇다면 적어도 청구인들의 피상속인들을 비롯한 한국인 BC급 전범들에 대한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에 관한 일본의 책임과 관련하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이 사건 협정 해석 및 실시상의 분쟁이 성숙하여 현실적으로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리기 어려워, 피청구인에게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른 분쟁해결절차에 나아가야 할 작위의무가 인정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렇게 판단하는 것과 관련, 다음과 같은 사정을 인정했다. 첫째, 청구인들은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와 관련하여 국제전범재판에 따른 처벌로 인한 피해 문제에 집중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 BC급 전범들로 구성된 「동진회」단체도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제전범재판소에서 BC급 전범으로 인정되어 처벌받은 피해의 보상을 요구하였고, 과거 일본 정부는 이를 일부 수용하여 보상을 한 적이 있었다. 셋째, 한국 정부는 국제전범재판에 의한 처벌로 피해를 입은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는 한일청구권협정과는 무관하게 일본이 주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문제라는 태도를 취해 왔고, 일본측에 입법을 통한 해결을 지속적으로 촉구하여 왔다.

재판부는 "설령 한국인 BC급 전범들이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일본의 책임과 관련하여 한국과 일본 사이에 한일청구권협정의 해석상의 분쟁이 존재한다고 보더라도, 피청구인의 외교적 재량을 고려하면, 피청구인이 그동안 외교적 경로를 통하여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에 관한 전반적인 해결 및 보상 등을 일본 측에 지속적으로 요구하여 온 이상, 피청구인은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른 자신의 작위의무를 불이행하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이에 대해 이석태, 이은애, 김기영, 이미선 재판관은 일제강점기 한국인 BC급 전범들이 입은 피해 가운데 국제전범재판에 따른 처벌로 인한 피해 부분에 대한 다수의견에는 찬성하지만, 일제의 불법적인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 부분에 대하여는 피청구인이 청구권협정 제3조에 따른 분쟁해결절차에 나아가지 아니한 부작위가 청구인들의 기본권을 침해하여 위헌이라는 반대의견을 냈다.

4명의 재판관은 "일제강점기 한국인 BC급 전범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 10대 후반 내지 20대의 어린 나이에 포로감시원으로서 반인도적이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강제동원되어 동남아 지역에 있던 일본군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면서 일본군 상관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명령에 복종한 채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정신적 · 육체적 피해를 입었다"며 "한국인 BC급 전범들은 이러한 일제에 의한 반인도적이고 불법적인 행위로 인한 피해를 인정받아 진상규명법에 의하여 설치된 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하여 '강제동원 피해자 또는 희생자'로 인정되었고, 따라서 한국인 BC급 전범들은 일본에 대하여 일제에 의한 불법적인 강제동원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청구권을 가진다고 할 것"이라고 밝혔다. 4명의 재판관은 "이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인하여 입은 피해에 대한 청구권과 그 성격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관들은 또 "한국인 BC급 전범들이 일제의 불법적인 강제동원으로 입은 정신적 · 신체적 피해는 역사적 사실과 경험으로 인정되는 그 예를 발견할 수 없는 특수한 피해이고, 이러한 일제의 불법적인 강제동원으로 인하여 한국인 BC급 전범들이 입은 피해에 대한 청구권의 실현을 가로막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의 침해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기본권의 중대성, 기본권 침해 구제의 절박성, 기본권의 구제가능성, 진정으로 국익에 반하는지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피청구인이 한국인 BC급 전범들이 일본에게 가지는 일제의 불법적인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청구권과 관련하여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이 사건 협정의 해석상의 분쟁이 존재함에도 피청구인이 협정 제3조에 따른 분쟁해결절차에 나아가지 아니한 부작위는 청구인들의 중대한 기본권을 침해하여 위헌"이라고 밝혔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