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타임즈 기고] 위안부 배상 판결과 주권면제
[리걸타임즈 기고] 위안부 배상 판결과 주권면제
  • 기사출고 2021.03.05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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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적 행위여야 주권면제 대상"

낯선 국제법 용어나 법리조차 이제 국민의 상식과 교양이 되고 있다. 지난 1월 8일 일본 정부에 위안부 배상책임을 인정한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판결과 함께 '주권면제(sovereign immunity)'니 국가의 '주권적 행위(sovereign act)'이니 '강행규범(jus cogens)'이니 하는 생소한 말들이 국민 곁으로 다가왔다. 1월 중순 선고가 예정됐던 또 다른 위안부 소송은 3월 말 변론이 재개된다. 재판부의 고뇌가 느껴진다.

주권면제의 법리에 따라 국가는 주권적 행위로 인해 타국의 재판관할권에 복종하도록 강제되지 않는다. 즉, 국가는 주권적 행위로 인해 강제로 타국의 법정에 서지 않는다. '주권적 행위'란 국가만이 갖는 주권적 권한(sovereign authority)을 행사하는 행위다.

◇박동실 전 주모로코 대사
◇박동실 전 주모로코 대사

국가의 행위가 주권적 행위로서의 자격을 충족하는지 판별하기 위해서는 각 행위를 그 성질 자체로 평가해야 한다. 주권면제라는 일반적인 원칙이 있고 그 예외가 존재하는 구조가 아니다. 행위의 성질상 국가만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주권적 행위다. 사인(私人)도 행할 수 있는 행위는 주권적 행위가 아니다. 따라서 주권적 행위와 비주권적 행위를 구별하는 척도는 국가만이 갖는 주권적 권한(sovereign authority)을 행사한 것인지에 달려 있다. 국유화 조치, 범죄자 처벌 등과 같은 행위가 주권적 행위이다. 국가의 국유화 조치로 피해를 본 타국 국민은 그 나라를 자국 법정에 세울 수 없다. 국가의 형벌권 행사로 부당한 처벌을 받은 타국 국민도 마찬가지다. 실제로는 모두 그러한 행위를 행한 국가의 법에 따라 보상이나 배상을 받게 되어 있다.

국가의 주권평등 원칙에서 비롯된 주권면제는 개별 국가의 법원 판결을 통해 관습국제법으로 형성됐다. 국가의 공적 기능을 보호한다는 사고가 주권면제 법리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다. 주권면제가 처음 도입된 당시에는 국가의 모든 행위에 대해 주권면제를 인정했다. 즉, 국가의 행위라는 이유만으로 주권면제가 인정됐다. 소위 절대적 주권면제론(absolute sovereign immunity)이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국가의 주권적 행위에만 주권면제를 인정하는 변화가 진행됐다. 당시 국가들이 영리를 추구하는 국영기업을 설립해 무역 활동에 나서면서 이러한 상업적 성격의 행위에 주권면제를 적용해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고, 이들과 거래하는 자국민이 부당한 피해를 보는 일이 빈번히 발생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주권적 행위에만 주권면제를 인정하는 제한적 주권면제론(restrictive sovereign immunity)이 확립됐다. 국가만이 갖는 주권적 권한을 행사한 행위가 주권적 행위다. 각 행위를 성질 그 자체로 평가해야 한다. 일반적인 주권면제 원칙과 그 예외가 존재하는 구조가 아니다.

1월 판결에서 재판부는 "이 사건 행위는 당시 일본제국에 의해 계획적,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행위로서 국제 강행규범을 위반한 것으로, 비록 이 사건 행위가 국가의 주권적 행위라고 할지라도 주권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권을 면제하게 되면 "인도에 반하는 중범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한 국제협약에 위반됨에도 제재할 수 없게 되고, 그로 인해 피해자들은 헌법에 보장된 재판받을 권리를 박탈당해 권리를 구제받지 못하게 돼 불합리하고 정당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사건 행위란 "한반도에 거주하던 원고들을 유괴하거나 납치하여 한반도 밖으로 강제 이동시킨 후 위안소에 감금한 채로 상시적 폭력, 고문, 성폭력에 노출시킨 일련의 행위"라고 지적했다. 실질적으로 성노예제(sexual slavery)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즉, 판결은 일본의 행위를 주권적 행위로 인정하면서도 강행규범을 위반한 인도에 반하는 중대한 불법행위이기 때문에 꼭 제재가 확보돼 피해자의 권리구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관점에서 주권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국제법 위반의 심각성(gravity of violation)을 이유로 주권면제를 배제한 셈이다. 강행규범 위반이 어떠한 법적 효과를 발생시키는지는 분석하지 않았다. 강행규범의 성질상, 그리고 주권면제는 국가의 주권적 행위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더 나아가 강행규범을 위반한 행위가 여전히 주권적 행위의 지위를 유지하는지 밝혔어야 한다.

'강행규범'은 전체 국가로 구성되는 국제공동체에 의해 승인된 보편국제법으로서 이탈이 허용되지 않는 상위의 절대규범(peremptory norm of general international law)을 말한다. '이탈이 허용되지 않는(no derogation is permitted)'의 의미는 국가들이 그 보편국제법에 위반되게 합의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강행규범을 위반한 조약은 처음부터 무효다. 관습국제법으로 존재했던 강행규범은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으로 성문화돼 그 실체가 더욱 뚜렷해졌다. 강행규범은 개별 국가의 재량의 범위를 넘어서는 국제공동체의 근본적인 공통 가치를 보호하기 위한 개념이다.

모든 국가가 자신의 주권적 권한을 포기해 어떤 보편국제법 규칙이 형성됐고, 또한 이탈이 허용되지 않는 강행규범으로 성립했다면 이제 국가는 이 규범을 위반할 수 있는 주권적 권한이 없어진 셈이다.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 주권적 권한이 없으면 주권적 행위를 할 수 없다. 따라서 강행규범 위반행위가 실제 행해졌다면 그 행위는 없는 권한을 행사한 것이므로 주권적 행위 자체가 될 수 없다. 노예무역 · 노예제나 제노사이드, 침략행위 등이 강행규범 위반이라는 데 이론이 없다.

국가들의 주권적 행위, 즉 합법화로 시행됐던 노예무역 · 노예제가 추후 금지되면서 그 금지는 보편국제법으로 형성됐고, 또한 국가들의 금지의무 준수와 그에 대한 믿음으로 이탈이 허용되지 않는 강행규범으로 성립했다. 국가는 노예무역 · 노예제를 다시 합법화하여 행할 수 있는 주권적 권한을 갖지 못하게 된 셈이다.

주권적 권한이 없으므로 주권적 행위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를 실제로 행했다면 없는 권한을 행사한 것이므로 그 행위는 주권적 행위가 될 수 없다. 주권적 행위가 될 수 없으므로 주권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도 본질적으로 이와 다르지 않다. 한국 법원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실질적인 성노예제로 판단했다. 따라서 강행규범을 위반한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국가의 주권적 행위에 해당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주권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ICJ '페리니 사건'과의 비교

일본군 위안부 판결은 2004년 이탈리아 대법원의 '페리니 판결'과 성격이 유사하다. 모두 각 사건 행위를 주권적 행위로 인정하면서도 강행규범을 위반한 심각한 국제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주권면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은 이탈리아 정부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으며, ICJ는 2012년 독일의 주권면제를 인정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ICJ의 결정에 따르기 위한 국내법을 제정했지만, 이탈리아 헌법재판소는 2014년 위헌 결정을 내렸다.

국제사법재판소 심리에서,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국민을 강제노역에 처한 독일군의 행위를 독일의 주권적 행위로 인정하면서도 독일의 행위가 강행규범 성격의 국제법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기 때문에 주권면제를 받을 자격이 없다(not entitled to immunity)고 주장했다. 즉, 국제법 위반의 심각성(gravity of violation)으로 인해 주권면제의 자격을 상실했다는 주장이다. ICJ는 이탈리아의 주장을 둘로 나눠, 먼저 국제법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 주권면제를 배제하는지 분석하고, 이어 강행규범과 주권면제 간의 관계를 분석했다.

ICJ는 먼저 심각한 국제법 위반행위가 주권면제를 배제한다는 명시적인 국제법 규칙이 없으며, 각국의 그러한 실행도 거의 없다는 이유로 이탈리아의 주장을 배척하고 독일의 주권면제를 인정했다. 이어 ICJ는 "강행규범은 실체규칙이고 주권면제는 절차규칙이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지 않아 강행규범 위반으로 인해 주권면제가 영향받지 않는다"고 정리했다.

이탈리아가 처음부터 독일군의 행위를 주권적 행위로 인정하고 들어갔기 때문에, 국제사법재판소는 강행규범을 위반한 행위가 주권적 행위 또는 비주권적 행위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분석하지 않았다.

강행규범 위반은 국가의 행위와 관련된 것이다. 주권면제의 법리 자체는 어떤 행위가 아니다. 따라서 ICJ는 먼저 독일군의 행위가 강행규범을 위반한 것인지를 분석했어야 했다. 그리고 강행규범을 위반한 것으로 판단되면 그 행위가 여전히 국가의 주권적 행위에 해당하는지 분석했어야 한다. 강행규범 위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가의 주권적 행위에 해당하면 주권면제가 적용되고, 주권적 행위에 해당하지 않게 되면 주권면제가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ICJ가 강행규범과 주권면제 간의 연결고리인 주권적 행위를 밝히지 않고 강행규범과 주권면제 법리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분석한 것은 공허한 일이다.

ICJ의 '페리니 사건' 판결에 대한 국제법 학자들의 비판은 두 갈래로 나뉜다. 첫 번째 비판은 국제인권법이나 인도법을 심각하게 위반한 행위는 비록 주권적 행위라 할지라도 주권면제를 적용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는 당위론적 비판이다. 두 번째 비판은 독일의 행위가 주권적 행위에 해당하는지 제대로 분석하지 않아 제한적 주권면제론이 아니라 오래전에 폐기된 절대적 주권면제론을 적용한 셈이라는 것이다.

박동실(전 주모로코 대사 · 뉴욕주 변호사, dspark624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