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보이스피싱 '행동책' 중국인 유학생들에 무죄 선고
[형사] 보이스피싱 '행동책' 중국인 유학생들에 무죄 선고
  • 기사출고 2019.12.26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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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지법] "사기 범의 추단 어려워"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자들의 돈을 보이스피싱 조직원에게 전달하는 '행동책'으로 활동한 중국인 유학생들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이례적으로 기존의 수사 관행을 강하게 비판했다. 주범은 체포하지 못하면서 '일회용 도구'에 불과한 행동책만 붙잡아 처벌하고 끝내면 범죄 예방효과가 없다는 취지다. 

서울동부지법 이형주 판사는 12월 11일 사기 방조 등의 혐의로 기소된 중국인 유학생 A(24)씨와 B(22)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2019고단2417, 2019고단3518).

한국의 한 대학교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한 A씨는 보이스피싱 전화 유인책의 지시를 받고 지난 6월 28일 오후 1시 10분쯤 서울 광진구에 있는 한 편의점 앞 길에서 보이스피싱 사기 피해자를 만나 2000만원을 전달받아 자신의 수당 20만원을 제외한 나머지 1980만원을 지시책이 알려주는 계좌에 제3자를 송금인으로 하여 수회에 걸쳐 송금한 혐의로 기소됐다. 전화 유인책은 이날 이 보이스피싱 피해자에게 연락하여, "서울서부검찰청 검사다, 귀하의 계좌가 대포통장에 이용되어 다수의 사람들이 1억원 상당의 피해를 입었으니 잘못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1억원 상당의 돈을 입금해줘야 한다, 귀하의 계좌에 있는 돈과 부족분에 대해서는 대출을 받아 지정하는 계좌로 입금하거나 현금을 인출하여 건네 달라, 조사 후 이상이 없으면 원상복귀 시켜주겠다"고 거짓말하고, 이를 믿은 피해자로 하여금 서울 광진구에 있는 편의점 앞으로 나오도록 유인한 후 A씨에게 휴대폰 메신저로 피해자의 인상착의와 만날 장소를 알려 주면서 현금을 수거하여 오라고 지시한 것으로 조사됐다.

다른 대학 사회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B씨도 전화 유인책의 지시를 받고 같은 날 오후 3시 17분쯤 서울 성동구에 있는 길 위에서 또 다른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만나 2000만원을 전달받아 자신의 수당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지시책이 알려주는 계좌에 제3자를 송금인으로 하여 수회에 걸쳐 송금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두 사람은 재판에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국내 중국인들이 여러 생활정보를 공유하는 사이트에서 중국어 통역 아르바이트를 모집한다는 구인 광고를 보고 일을 하기로 했는데, 업체로부터 갑작스럽게 지시를 받고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피해를 모두 변상하고 합의했다는 점도 강조했다.

검찰은 이들이 연로하고 평범한 피해 여성을 만나 돈을 받으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을 인정하는 점 등에 비추어 범의가 추단된다고 주장했다.

이 판사는 그러나 "주관적 구성요건인 범의는 구체적 범종을 특정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사건에서는 보이스피싱 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사기 범행에 가담한다는 인식과 의욕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고 막연한 불법에 대한 인식이나 의심만으로는 사기의 범의가 되기 부족하다"고 전제하고, "검찰 증거로는 피고인들의 범의를 추단하기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사는 "보이스피싱 범행은 주로 범죄에 취약한 계층을 대상으로 여윳돈을 전부 긁어갈 뿐 아니라 피해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대출까지 일으키게 하여 받아가고, 사회 전체적으로 피해 규모가 크고 수그러들 조짐이 보이지 않아, 엄단이 필요함은 이론이 있을 수 없다"면서도, "그런데 주범이 잡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행동책이 유죄로 인정되는 경우 거의 주범과 같은 책임이 인정되고, 위와 같은 엄단의 필요성이 자칫 형사원칙의 왜곡이나 완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고 밝혔다.

또 "행동책은 주범들과 사전 면식이 있거나 일정한 관계, 지인들이 아니고 국내, 국외(중국, 말레이시아, 대만 등 중국인이 거주하는 아시아권 모든 국가)에 아르바이트 시장에서 무한대로 조달될 수 있는 '일회용 도구'에 불과하므로 행동책에 대한 엄중한 처벌이 주범들에게 범행 자제나 회피로 연결되지 않는다"며 "(행동책) 조달에 약간의 노력과 비용을 들여야 하지만, 지급 정지될 경우 미련 없이 버리면 되는 '대포 계좌'와 같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 판사는 "현재 행동책이 체포되면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원이 체포되었다고 발표하고는 사건을 종결 짓고, 주범에 대해서는 전혀 수사를 하지 않는데, 수사기관의 주범에 대한 근원적 수사 독려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중국 등 외국 기관과의 공조, 메신저나 휴대폰 등 통신 자료 추적 등 개별 사건의 처리 뿐 아니라 범행의 도구로 쓰이는 통신중계기에 대한 일반인의 사용 자체의 금지(외국에서 걸려온 전화를 국내 휴대폰 번호로 변조하는데 활용, 현재는 범행 등 부정한 목적인 경우만 처벌) 등 제도적으로도 보완할 요소가 많다"고 덧붙였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