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 버스와 문화적 다양성
북경 버스와 문화적 다양성
  • 기사출고 2011.10.18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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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환 검사]
북경을 처음 방문한 사람이면 누구라도 깜짝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버스 종류의 다양성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일반버스' 외에도 출입문이 세 개이고 두 대의 버스를 붙여놓은 것 같은 이른바 '굴절버스'가 있고, 전기를 공급받아 운행되는 '전기버스'는 물론이고 영국 런던의 명물인 '2층버스'도 있다. 이 정도면 세계 유명 도시에서 운행되는 거의 모든 버스를 북경에서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노정환 법무협력관
이처럼 중국은 장기간의 공산당 일당 독재라는 정치적 상황과는 별개로 다양하고 이질적인 존재들이 의외로 별다른 갈등 없이 상존한다. 중국에는 보편성과 통일성이 강조되는 우리와 달리 다양성과 개성이 폭넓게 인정되는 대륙 특유의 문화적 포용성이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이민족 왕조에 의해 번갈아가며 통치를 받고, 다양한 민족을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야만 하였던 오랜 역사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역사를 통하여 중국인들은 이질적이고 다양한 요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비법을 저절로 터득하였을 것이다.

피부색과 언어 그리고 문화가 다른 민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함께 상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문화적 혹은 정치적 자산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화합(和合)의 정신일 것이다. 상대방 또한 나와 같은 존귀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설사 이해관계가 상충한다 할지라도 상대방을 존중하여 평화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원만하게 조정하고 해결하는 것, 그것이 바로 화합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和'자 돌림 자금성 건축물

중국의 정치사에 있어 화합의 정신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자금성에서 황제가 정무를 보았던 3대 건축물인 태화전(太和殿), 중화전(中和殿), 보화전(保和殿)의 이름은 모두 화합을 의미하는 '화(和)'자가 포함되어 있다. 중국을 상징하는 대표적 문화유산인 자금성은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고의 통치기술은 권력도, 무력도 아닌 화합이다"라고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북경 최대 불교 사찰인 옹화궁(雍和宮)에서도 화합의 정신을 찾을 수 있다. 청나라 6대 황제인 건륭제가 민족통합 정치를 강조하며 티베트 장족을 회유하기 위하여 친아버지인 옹정제의 집을 이민족의 종교사찰로 과감하게 개조한 것이 바로 옹화궁의 유래이다. 그 뿐만 아니다. 역대 황제들의 여름 별궁인 승덕(承德)의 피서산장(避暑山莊)에는 거대한 초원과 이동식 몽고천막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청나라 4대 황제인 강희제가 몽고족을 회유할 목적으로 몽고 왕자와 함께 말을 타고 숙소를 제공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다양성을 존중하고 화합을 강조하는 모습은 중국의 문화유산 곳곳에 녹아 있으며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청나라 시절 4개 민족의 언어로 조성된 비석들과 현판들이다. 당시 지배계층이었던 만주족의 언어 외에도 피지배계층인 한족, 몽고족, 티베트의 언어들도 함께 새겨져 있다. 다양성 보다는 통일성을 강조하는 우리 역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다.

공자, 노자 함께 모신 현공사

다양성을 인정하는 화합의 정신은 중국인의 생활과 정치 뿐 아니라 종교에서도 발견된다. 과거 산서성 항산(恒山)에 위치한 현공사(顯空寺)라는 절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곳은 불교의 성지임에도 불구하고 석가모니 외에도 유교의 공자와 도교의 노자가 함께 모셔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교회당에서 부처님을 함께 모시는 건축물을 짓고 참배를 허락하거나 혹은 그 반대의 일은 현재의 정서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은 엄숙함과 정통성이 강조되는 종교조차도 상대 종교를 인정하고 상존하는 지혜를 배운 듯하다.

오늘날 중국 헌법 역시 민족의 다양성을 전제로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호하고 민족자치를 실현하기 위한 규정들로 빼곡하다. 헌법 제4조에서 "중국의 각 민족은 일률적으로 평등하다"고 선언한 것을 비롯하여 소수민족이 자치정부를 구성하고 자신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고 문화를 발전시킬 권리를 인정하고 있으며, 전국인민대표대회와 국무원, 그리고 지방정부 관련 조문에서도 이와 관련한 상세한 규정을 두고 있다. 더 나아가 천안문에 위치한 건국기념물인 인민영웅기념비에서도, 1위엔과 10위엔 화폐 도안에서도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

다문화가정 50만 가구 넘어

최근에 이르러 우리도 '단일민족'에서 비롯된 순수성, 정통성 중심의 사고에서 조금씩 탈피하여 다민족에 기초한 문화적 다양성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즉, 단군 이래 수천 년 동안 순수혈통의 단일민족인 '한민족'으로 살아왔다는 우리의 민족의식은 최근 다문화가정의 증가와 함께 조금씩 변모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편중된 성비례로 인해 농촌총각의 결혼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중국 조선족은 물론이고 필리핀, 태국, 몽골, 베트남 등 외국인과의 국제결혼이 성행하였고, 이미 다문화가정은 50만 가구를 넘어서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과 국제교류가 활발해 짐에 따라 외국인 근로자의 유입이 급속히 증가하여 국내 거주 외국인은 100만 명을 넘는다.

우리의 '단일민족' 의식은 민족적으로 단결하여 외세침입과 같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매우 긍정적 힘을 발휘하여 왔다. 하지만 오늘날 국제화시대에 이르러서는 순수혈통을 강조함으로써 다양성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여 오히려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뿌리 깊은 단일민족 의식에 기초한 우리의 '화합'은 정통성과 순혈주의에 기초하여 획일적인 '통일'을 강조함으로써, 소수의 견해는 통일을 저해하는 요소로 간주되어 배척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다문화, 국제화라는 현실 하에서 '화합'은 다양성을 인정하는 거시적이고 관용적인 새로운 의미로 거듭나야 한다.

북경의 버스가 부러운 것은 바로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적 풍토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EU통합, 아시아 · 태평양 경제권 등과 같이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정치적 · 경제적으로 통합하려는 세계적인 조류에 동승하기 위해서라도 다양성의 존중은 필수적이다. 중국처럼 다양성을 폭넓게 받아들여 원만하게 사회적 통합을 이루면서도 우리의 단일민족 신화를 유지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중국의 다민족정책을 배워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55개 소수민족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도 전체의 95%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 중심으로 사회가 유지되는 비결을 한번 쯤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노정환 검사(주중대사관 법무협력관, lawfire200@spo.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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