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외국변호사의 기술⑮ 국제 컨퍼런스의 기술
[특별연재] 외국변호사의 기술⑮ 국제 컨퍼런스의 기술
  • 기사출고 2023.10.10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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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서울 PRAC 컨퍼런스 실무 맡아 '컨트리 브리핑'

영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한국 로펌의 외국변호사는 사무실을 대표해 민간외교관 역할을 할 기회가 종종 생긴다. 내 경우에는 다양한 국제 컨퍼런스 활동을 통해 그런 역할을 많이 할 수 있었는데, 업무 외적인 면에서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해외 출장을 많이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어소 변호사 시절부터 해외 컨퍼런스에 참석할 기회가 많았다. 고된 업무를 뒤로 하고 가끔 비행기를 타고 해외 컨퍼런스에 참석하게 되면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기분 전환도 되곤 했다.

◇은정 외국변호사
◇은정 외국변호사

입사 후 3년차 때인 2000년부터 당시 대표변호사님이 우리 회사(법무법인 김장리)가 회원사로 있는 로펌 네트워크인 Pacific Rim Advisory Council(PRAC)이 매년 세계 각국에서 컨퍼런스를 열 때 자주 나를 대동했다. 여느 로펌 네트워크와 마찬가지로 PRAC도 회원사들이 돌아가며 컨퍼런스를 주최하는데, 도쿄, 홍콩을 시작으로 뉴질랜드, 콜롬비아, 필리핀, 스페인, 미국 등을 다니며 사무실 대표로 여러 차례 참석했다. 단순 업무차 나가는 해외 출장은 공항과 호텔, 고객사만 오가느라 출장지를 자세히 살펴볼 시간을 갖기 어렵지만, PRAC 컨퍼런스는 다양한 주제의 강연은 물론이고, 칵테일파티와 만찬 등 친교모임, 그리고 주요 관광지 방문 일정이 으레 포함되어 있어 주최 로펌과 출장지의 면면을 깊숙이 살펴볼 수 있는 재미가 쏠쏠했다.

PRAC 회원사 Hogan & Hartson과 Lovells 합병

PRAC은 나라마다 회원사를 하나밖에 두지 않아 회원사가 전부 30개 정도다. 규모가 비교적 작은 로펌 네트워크이지만, 각국을 대표하는 쟁쟁한 로펌들을 회원사로 두고 있고, 참석하는 변호사들의 면면도 주로 대표나 시니어 파트너급이다. 2000년대 당시 미국과 영국 · 홍콩을 각각 대표하는 회원사로 Hogan & Hartson과 Lovells에서 대표급 변호사들이 참석하곤 했다. 그 후 2010년 PRAC 회원사인 두 로펌이 갑자기 합병을 발표하여 미국과 유럽을 아우르는 거대 로펌인 Hogan Lovells가 탄생하며 국제 로펌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PRAC 회원사들이 그런 결정을 내린 게 신기했고, 혹시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양사의 고위급 변호사들 사이에서 합병에 관한 논의가 오가지 않았을까 하고 재밌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Hogan Lovells는 아직까지도 미국과 홍콩을 대표하는 PRAC 회원사로 남아있다.

회원사 관계자만 참석하는 PRAC 컨퍼런스는 그 특성상 참석 인원이 몇 십명 밖에 되지 않아 행사 기간 내내 같은 동선을 유지해야 하고 친교모임에도 참석해야 해 무척 강도 높은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몇 천명이 참석하는 국제변호사협회(IBA)와 같은 대규모 총회 성격의 컨퍼런스나 특정 주제를 다루는 국제상표협회(INTA) 또는 리걸테크 등 특정 업종의 주도적인 회사들이 개최하는 전문분야 컨퍼런스와 같이 본인이 참석 프로그램을 취사선택하고 혼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몇 번 PRAC 컨퍼런스를 다녀온 후에는 나 혼자 사무실 대표로 다녀오는 때도 종종 있었다. 2007년 서울에서 열릴 PRAC 컨퍼런스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미리 견문을 넓히고 인맥을 쌓게 하려고 저년차때부터 컨퍼런스 업무에 투입되었던 것 같다.

콜롬비아 PRAC 컨퍼런스도 참석

PRAC 컨퍼런스로 가본 나라 중에 기억에 남는 나라는 단연 2007년 3월에 갔던 남미의 콜롬비아다. 한국에서 워낙 멀기도 하고 평소 가볼 기회도 없어 설레는 마음으로 갔는데, 서울-콜롬비아 직항편이 없어 미국 마이애미를 경유해 거의 24시간이나 걸려 수도인 보고타의 국제공항에 녹초가 되어 도착했다. 보고타는 치안이 불안한지 행사장이 있는 대형 건물에 출입할 때 금속탐지기로 모든 사람을 검색했던 기억이 난다. 주최 로펌인 콜롬비아의 유력 로펌인 Brigard & Urrutia를 방문하여 콜롬비아 변호사들과 환담을 하며 사무실을 구경하기도 했다. 이렇게 주최 로펌을 방문하여 사무실 분위기를 살피는 게 PRAC 컨퍼런스의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얼마 전 타계한 '풍만의 미학'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인 콜롬비아 출신의 페르난도 보테로의 작품을 전시한 보테로 미술관(Museo Botero)도 방문했는데, 미술에는 문외한이어서 그가 그렇게 유명한 작가임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컨퍼런스 출장지에서 주최측이 엄선한 관광지를 방문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보고타에서 짧은 2박을 한 후 항공편으로 콜롬비아 북부의 항구도시인 카르타헤나(Cartagena)로 행사 장소를 옮겼다. 카르타헤나는 식민지 시절의 스페인 건축양식의 건물들이 곳곳에 즐비한 무척 이국적인 도시였다. 파스텔 색의 멋진 건물들과 야자수가 즐비한 광장, 첨탑이 웅장한 성당 등을 보다 보면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했다. 특히 카르타헤나에 도착한 다음 날 저녁이 되자 주최 로펌이 호텔 앞에 흰 말이 끄는 마차 몇 십대를 도열시키고 컨퍼런스 참석자들을 태웠다. 돌길 위로 수십 마리의 말들이 딸깍 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내며 올드 시티 시가지를 지나 만찬 장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행렬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카르타헤나에서 보낸 마지막 날 밤, 야자수로 가득한 호텔 정원의 갈라 디너 행사에서 PRAC의 전통대로 내가 다음 개최지 로펌인 법무법인 김장리의 대표로 PRAC의 깃발을 건네받았다.

서울로 돌아오자 여러 달 동안 2007년 10월 열릴 서울 PRAC 컨퍼런스를 실무 책임자로 준비해야 했다. 그때만해도 컨퍼런스를 조직해본 적이 없어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과거에 여러 번 PRAC 컨퍼런스를 참석한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PRAC 사무국과 예산 배정, 프로그램 구성, 컨퍼런스 책자 제작, 기념품 준비, 연사 섭외, 친교모임 장소 선정 등 여러 현안을 수시로 협의했고, 행사장 호텔로는 사무실에서 가까운 조선호텔을 선정했다.

서울 PRAC 컨퍼런스가 열렸을 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통상 주최 로펌이 자국의 법률시장 현황에 대해 '컨트리 브리핑'을 하는 순서를 맡게 되는데 이 순서는 내가 담당했다. 마침 그 당시 한국은 임박한 법률시장 개방, 로스쿨 제도 도입 등 굵직한 현안들이 많아 흥미로운 브리핑을 할 수 있었다. 친교행사로는 성북동에 있는 한국가구박물관에서 가이드투어를 한 후 한옥 건물 여러 채로 이루어진 널따란 박물관 경내에서 가든파티 겸 점심식사를 했다. 이때 한옥 건물 곳곳에 가야금 연주자들을 배치하여 가야금 소리를 들으면서 식사를 했는데 참석자들이 한국적인 장소와 분위기에 흠뻑 취한 채 한국 문화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었다.

PRAC 컨퍼런스 관련 업무는 다른 변호사에게 넘겼지만, 국제 컨퍼런스 활동은 여전히 활발하게 하고 있다. 요즘에는 내 고객들이 많은 싱가포르, 상하이 등 아시아 지역에서 열리는 비즈니스 이미그레이션 컨퍼런스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고, 연사로 나서는 경우도 있다. 또한 다른 로펌과 함께 고객사들을 위한 비즈니스 이미그레이션 컨퍼런스를 싱가포르와 서울에서 몇 번 조직하기도 했는데, PRAC을 통해 쌓은 컨퍼런스 실무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이런 다양한 국제 컨퍼런스 활동이 내 외국변호사 커리어를 더 흥미롭고 풍요롭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은정 외국변호사(법무법인 김장리, jun@kimchangl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