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대엽 법원행정처장 취임사 전문
천대엽 법원행정처장 취임사 전문
  • 기사출고 2024.01.15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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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성, 예측가능성, 신속성, 공정성, 책임성 담보되어야 사법부 제 역할 다할 수 있어"

지난 주 우리는 평소 철두철미한 업무처리로 정평이 난 판사님 한 분이 과로 속에 급작스럽게 유명을 달리 하는 비보를 접했고, 연이어 오랜 투병 생활 중에도 업무를 놓지 않았던 행정관님 한 분이 숙환으로 유명을 달리 하는 비보도 접했습니다. 취임사에 앞서, 숙연한 마음으로 두 분의 명복을 빌고, 깊은 애도의 말씀을 올립니다.

존경하는 전국의 법원 구성원 여러분!

밀려드는 많은 사건들 속에서, 성실히 맡은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계시는 전국의 법관 및 직원 여러분께 큰 감사와 존경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힘든 변화의 시기에 의연하게 사법행정을 잘 이끌어 주신 김상환 대법관님께도 경의를 표합니다.

지난해 사법부는 대법원장 궐위 등의 혼란을 겪었고, 사법부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와 변화의 요구는 더욱 커져가고 있습니다.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점에 법원행정처장의 중책을 맡게 되어 두렵고 무거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이 1월 15일 취임사를 하고 있다.
◇천대엽 법원행정처장이 1월 15일 취임사를 하고 있다.

지난 수년간 사법행정의 비중을 축소하고 권한을 분산하는 노력으로 여러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제 이러한 성과를 토대로 이 시대 국민과 사회가 진정으로 요구하는 사법부를 구현하기 위한 사법행정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한 실질적인 검토와 실천을 해 나갈 시점이 되었습니다.

사법부는 신뢰성, 예측가능성, 신속성, 공정성, 책임성이 담보되어야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고, 사법제도는 이러한 가치와 기능을 구현할 때 그 의미를 갖습니다. 사법행정의 담당자는 이러한 사법의 가치가 재판에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 나아가 사법부에 요구되는 시대적 · 사회적 화두가 무엇인지를 늘 성찰하고 고민하여야 합니다.

당면한 사법의 과제는 재판지연 해소입니다. 신속 · 공정한 재판을 통한 국민의 기본권 보장은 사법부의 소명입니다. 그럼에도 분쟁해결의 적기를 놓쳐 처리기간이 장기화되는 등 최종적 분쟁 해결기관인 사법부의 역량에 대한 여러 의구심이 제기되는 현실이 뼈아프게 느껴집니다.

사실심의 최종 심판자이자 법관인사 이원화의 근간인 고법판사들이 건강과 육아 등 여러 원인으로 대거 사직을 반복하는 현상은 사실심의 안정적 운영까지 어렵게 하고 있습니다. 법관 및 직원들의 잦은 사무분담 변경은 사법부의 전문성 약화, 직접심리주의의 왜곡과 재판지연을 초래할 수 있다는 비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법부의 문화와 일상의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합의부와 형사부 기피 현상, 구성원 간 경험의 공유와 균형감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건전한 소통과 토론의 감소, 묵묵히 성실하게 근무하는 법관과 직원의 과로로 인한 건강악화나 사직 등도 어느 하나 가볍게 볼 수 없는 문제입니다.

사법부의 자랑인 사법전산시스템 마비로 인한 재판중단과 해킹, 대국민 사법서비스의 한 축인 공탁 부문 횡령 등이 사법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상실케하는 적신호는 아닌지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현실의 과제를 파악하고 사전 · 사후적 조치를 강구하는 것이야말로 법원행정처와 각급 법원의 사법행정권자가 함께 해야 할 역할입니다.

변화의 방향과 속도를 정함에 있어서는 국민을 섬기는 사법부 본연의 임무가 충실히 구현되는 제도를 마련하여 운영한다는 원칙을 견지하면서, 이를 맡아 할 사법부 구성원 의견을 효율적으로 수렴 · 반영할 수 있는 방안도 강구하겠습니다.

국민에게 도움되는 연속성 있는 재판을 위해 한 법원에서는 가급적 한 재판부에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인사 및 사무분담 원칙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법관인사 이원화가 사실상 완성된 고등법원 중심으로 기수 제한 등 다수 지방법원 법관의 진입장벽을 없애는 한편, 불필요한 전보 등 인사를 최소화하는 방안도 마련함으로써 이원화의 토대 위에 사실심 전체의 유기적인 운영을 도모하여야 합니다.

바람직한 재판을 위한 인적기반 마련에 필수적인 법관 증원 및 젊고 유능한 법관 충원, 오랜 경륜과 경험을 갖춘 법관의 적극적 활용을 위한 제도의 도입, 재판연구원 증원 및 법원 공무원의 역할 확대도 필요합니다. 비선호 보직에서 묵묵히 헌신하는 법관 및 직원에게는 합당한 처우가 이루어지도록 법원장, 수석부장판사 등과 함께 세심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겠습니다.

재판과 민원업무의 인공지능 활용, 등기 · 신청 등과 같은 일상적 대국민 사법서비스 편의성의 획기적 개선을 위한 방안도 마련되어야 합니다.

차세대 사법전산시스템의 시작과 고도화를 통해 재판업무의 시 · 공간적 한계를 극복함으로써 일과 가정이 양립 가능하게 하여, 미래세대의 가치와 시각에서 재판지연을 해소할 수 있는 창의적 방안도 연구 · 도입되어야 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법원 구성원 여러분!

사법부의 본분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분쟁을 공정하면서도 신속하게 해결함으로써, 법적 분쟁으로 질곡의 시간을 보내는 관계자들과 공감하고 그 고통을 덜어드리는 것에 있습니다. 재판지연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도 이러한 고민 속에서만 그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사법부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사회의 발전과 변화에 뒤처지지 않기 위한 끊임없는 연구와 소송당사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기 위한 노력을 다하기 위해, 늦은 시간이나 휴일에도 근무하는 법관의 희생과 헌신이 당연시되는 제도와 인식 아래 선진사법의 미래는 올 수 없습니다. 재판지연의 해소와 대국민 사법서비스의 획기적 개선을 위해서는 선진국의 역사적 경험과 현실에 비추어 입법적 뒷받침이 필수적입니다.

제도의 도입과 개선에 필요한 사법예산의 확보 역시 재판지연 해소와 대국민 사법서비스의 질적 도약을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삼권분립의 한 축을 담당하는 사법부 예산이 국가 전체 예산의 0.5%에도 미치지 못하고 그 비율마저 감소하고 있는 현실은, 단순히 사법부 역할 수행의 어려움을 넘어 우리의 국제적 위상에도 맞지 않습니다.

법치주의의 보루인 법관이 헌신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을 넘어, 판결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아닌 법관 개인에 대한 부당한 비난으로 법관의 독립성과 소신이 위축되는 현상에 대해 법원행정처가 제 역할을 다함에 미흡함은 없는지 되돌아보고, 사법의 가치와 한계에 관한 국민의 이해를 높이기 위한 노력도 계속하겠습니다.

법원행정처 구성원 여러분!

계속되는 격무 속에 헌신적으로 직무를 수행해 온 여러분의 노고에 다시금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위해서는 여러분의 노력과 헌신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저 역시 여러분이 자긍심을 갖고 직무에 전념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의 조성에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존경하는 법원 구성원 여러분!

제가 맡은 자리는 혼자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감당할 수 없고, 여러분들 모두의 국민과 사법부에 대한 사랑과 지혜를 남김없이 담아 차근차근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열과 성을 다해 함께 해 주실 여러분을 믿고 노력하겠다는 다짐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의 앞날과 가정에 언제나 건강과 행복이 함께 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24. 1. 15.
법원행정처장 천 대 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