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외국변호사의 기술⑯ 커리어 전문화
[특별연재] 외국변호사의 기술⑯ 커리어 전문화
  • 기사출고 2023.12.08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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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오션 된 출입국관리 업무 개척 보람"

나는 20대 후반인 1998년 법무법인 김장리에 입사해 26년째 같은 로펌에서 외국변호사의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처음 10년 동안은 주로 일반 기업법무와 M&A(general corporate & M&A) 분야에서 활동했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일을 하면서 국제 회사법무에 관해 폭넓은 경험을 쌓았고, 특히 이 기간 동안 내가 한국 로펌 소속 외국변호사의 3대 기본기로 꼽는 한국법 노하우, 법률번역 기술, 영문계약 실무 능력을 단단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은정 외국변호사
◇은정 외국변호사

그런데 같은 한국 로펌에서 일한지 10년이 되어가자 매너리즘에 빠져서 그런지 무언가 변화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동안 제너럴리스트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것은 좋았지만, 막상 어떤 특정 업무분야를 내 전문분야로 내세울만한 자신감이 없었다. 내 자신이 40대 또는 50대 이후까지 한국에서 외국변호사로 커리어를 잘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을 과연 갖추고 있는지 불안했다. 당시 30대 후반이 된 내 자신을 돌아보니 어떤 한 분야에 통달한 전문가가 아닌, 여러 분야에서 일정한 역할을 단순 반복하는 비전문가의 모습만 보였다.

예를 들면 M&A 업무를 많이 하긴 했지만, 딜 구조의 설계와 법률실사, M&A 계약 실무, 인허가 문제, 각종 법률 이슈의 해결, 거래종결 등 M&A의 전 과정을 전문가 수준으로 마스터하지 못하고 그저 피상적으로만 아는 상태였다. 규모가 크지 않은 딜은 한국변호사들과 역할을 분담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처리하곤 했지만, 내가 처리하고 싶어했던 신문지상에 오르내릴만한 큰 규모의 복잡한 딜을 주도적으로 처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큰 딜에 있어 내 나름대로 외국변호사의 한정된 역할을 극복하려고 많이 노력하긴 했다. 하지만 한국법 이슈들이 많이 대두되는 큰 딜에서 외국변호사로서의 내 역할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큰 딜에서의 나의 주된 역할은 영문 법률실사 보고서의 작성 총괄, 주요 법률문서의 국영문 번역, 기업결합신고에 필요한 정보 및 서류의 취합, 거래종결 준비 등을 책임지는 것이었다. 외국변호사가 M&A 거래에서 통상 담당하는 중요한 지원 업무이긴 했으나, 내가 정말 깊이 있게 경험하고 싶었던 업무는 M&A 딜의 구조 설계, 주요 딜 계약의 작성과 협상 등 보다 핵심적인 업무였다.

'법률 기능공' 역할에 피로감

하지만 그런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내가 M&A 계약의 업무기술에 얼마나 집착했는지 나중에 고려대에서 금융법학 석사학위를 받을 때의 논문 주제가 "위험분배 관점에서 본 M&A 계약의 쟁점"이었다. 이런 상태로 10년차 외국변호사가 되자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전문가가 되기는커녕 앞으로 일정한 역할을 소모적으로 수행하는 일종의 '법률 기능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피로감까지 느꼈다.

내 커리어가 정체기에 접어든 것은 물론 회사 잘못이 아니었다. 외국변호사의 통상적인 역할에 만족하지 못하는 욕구불만을 강하게 느끼면서도 내가 원하는 업무 분야에서 그 역할을 벗어나는 데 필요한 노하우와 기술, 실력, 인맥 등을 두루 갖추지 못한 나의 능력부족 탓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한국 로펌에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외국계 회사 사내변호사로 옮겨 승부를 볼까 하는 생각으로 몇몇 회사들과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1년 이상 이런 고민과 방향 전환을 시도하다가 내 방향성과 맞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쌓은 M&A 등의 기업법무 경험은 내게 하나의 수련 과정일 뿐, 그 분야가 궁극적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점차 들기 시작했다. 

반대로 한국 로펌에서 외국변호사로 근무한 지 6년차 때인 2003년부터 조금씩 해오던 다국적기업 임직원의 출입국관리(한국 워킹비자) 업무가 10년차가 된 2000년대 후반이 되자 업무량이 상당히 늘어나 무시하지 못할 정도의 매출이 생기고 있었다. 수많은 다국적기업을 고객사로 두고 있는 외국 이미그레이션 로펌들은 한국에 사무소를 두고 있지 않아 안정적으로 한국 워킹비자 취득 · 관리 업무를 소화해줄 한국 파트너가 절실히 필요한데, 여러 외국 로펌들이 우리 법인에 의뢰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좀 더 체계적인 관리가 필요했다.

업무량이 계속 늘어나자 사무실에선 기존 출입국관리팀의 인력을 보강하는 차원에서 출입국관리 업무를 전담할 패러리걸 두 명과 비서 두 명을 새로 충원해주었다. 출입국관리법상 기술적인 문제나 법 위반 사항이 발생하면 붙박이로 조언해줄 한국변호사도 배정해주었다.

이 무렵 나는 일종의 파트너에 해당하는 선임 외국변호사가 되었고, 출입국관리 업무로 계속 더 바빠졌다. M&A 등의 딜 업무에 쏟을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내 관심사는 딜 업무에서 출입국관리법상의 비자발급과 체류관리 업무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외국 전문인력 수요 늘며 비자업무 각광 

2010년대에 들어서자 한국 등 주요국마다 자국의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숙련된 외국인 인력, 특히 전문인력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출입국관리업무가 한층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우리 팀은 갈수록 바빠졌다. 2003년부터 해오던, 처음엔 별 관심을 받지 않던 출입국관리업무가 10년이 더 지나면서 일종의 블루오션이 된 것이다.

어차피 기업법무는 외국변호사가 많이 활동하는 경쟁이 심한 분야이니 출입국관리 분야에서 활동하면 심한 경쟁 없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마음으로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기업법무를 하든 출입국관리 업무를 하든 내 주된 업무는 늘 한국변호사들과 역할을 분담하며 외국 고객들을 관리하면서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일이지만, 출입국관리 업무는 외국변호사 고유의 영어 커뮤니케이션을 순발력 있게 잘 해내는 게 특히 중요하다.

기업법무 어소 변호사로 10년간 일하면서 쌓은 다양한 경험도 출입국관리 업무에 도움이 되었다. '출입국관리' 업무가 나무라면 그동안 어소 변호사로 경험한 '기업법무'는 큰 숲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출입국관리 분야의 A부터 Z까지 마스터하고 점점 내공이 쌓이면서 비즈니스 이미그레이션 전문가로 발돋움하기 시작하자 기업법무를 주로 하던 시절에 느꼈던 욕구불만이 해소되었다. 어려운 비자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오는 일하는 재미도 상당했다.

외국 이미그레이션 로펌들 사이에 우리 팀이 워킹비자 업무를 체계적으로 잘 처리한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관련 일이 계속 몰려들어 지속가능한 외국변호사 커리어로 이어갈 수 있는 동력도 생겼다. 20년 전 하나의 부전공 분야로 시작한  출입국관리 업무를 전문분야로 삼아 올인하면서 생긴 변화였다. 기업법무라는 넓은 분야에서 출입국관리라는 보다 전문적인, 내게 적합한 분야로 프랙티스 범위의 폭을 좁힌 것(narrow down)이 오히려 내 외국변호사 커리어의 큰 전환점이 된 것이다.

은정 외국변호사(법무법인 김장리, jun@kimchangl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