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외국변호사의 기술⑭ 외국변호사의 가면증후군
[특별연재] 외국변호사의 기술⑭ 외국변호사의 가면증후군
  • 기사출고 2023.09.06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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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급 조연'으로 빛날 기회 얼마든지 있어

요즘 직장인 소셜미디어인 링크드인(LinkedIn)을 보다 보면, 외국의 변호사들, 특히 미국의 변호사들이 '가면증후군(Impostor Syndrome)'에 시달리고 있다고 호소하는 포스트를 종종 보게 된다. 가면증후군이란 스스로를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여 맡은 업무가 자신의 역량에 비해 과분하고 지금까지의 성과가 운이 좋아서 가능했으며, 언젠가 직장에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밝혀질 수 있다는 초조함을 느끼는 불안심리를 일컫는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Impostor(사기꾼)'라는 단어는 불안 심리를 느끼는 당사자가 자신이 이룬 성과에 대해 주변인을 속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다.

미 변호사들의 'Impostor Syndrome' 포스팅

처음에는 'Impostor Syndrome'에 대해 포스트를 올리는 변호사들이 하도 많아 '자신감 부족' 혹은 '자존감 부족'을 거창하게 포장한 개념이 새로 유행하나 싶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면증후군은 특정 분야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룬 사람이 그 성공이 자신의 능력에 기인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느끼는 불안감이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한 시도조차 하기 어려워하는 심리인 '자신감 부족'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심리학 전문가도 아닌 내가 그 차이를 면밀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한국 로펌의 외국변호사들 역시 일하면서 이런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은정 외국변호사
◇은정 외국변호사

자격국이 아닌 한국에서 '외국변호사'로 일하면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한국법에 대해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 업무의 특수성, 롤모델이 될 만한 선배 외국변호사의 부재, 한국변호사들과 일하면서 종종 느끼는 소외감 내지 외로움 등 외국변호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자신이 '가면'을 쓰고 일한다는 생각이 종종 드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특히 미국 로스쿨을 졸업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주니어 외국변호사나 미국 로펌에서 프랙티스를 하다가 한국 로펌에 합류한지 얼마 안 된 중견 외국변호사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생소한 한국 로펌 환경에서 "과연 잘 할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주시하는 한국변호사 동료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에 초조함을 느끼기도 쉽다.

26년째 같은 한국 로펌에서 외국변호사로 일하면서 이런 복잡한 감정이 느껴질 때 어떻게 대처하고 극복했는지 내 경험담을 공유한다.

외국변호사 역할 숙지부터

일단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외국변호사는 한국변호사가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과 한국 로펌 소속 외국변호사의 역할을 제대로 숙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외국변호사의 역할은 '한국법'이라는 한국변호사의 영역을 존중하면서 그 영역 내에서 영문 문서나 국제계약 작성, 법률 번역 등 각종 영어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활용하여 한국변호사를 지원하는 것이다.

외국변호사로서 한국 로펌 생활이 26년째 접어들었지만, 나는 한참 후배인 2~3년차 한국 어소변호사들과 일할 때에도 늘 겸손한 자세로 일하려고 노력한다. 젊은 한국 어소변호사들의 입장에서는 오랜 기간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고, 특정 업무에서는 나보다 경험이 부족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동안 축적된 자료와 경험담을 그들과 공유하고 의견과 방향성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한국법 사안에 관한 최종 결정은 한국변호사의 의견을 따른다는 태도로 업무에 임한다.

물론 한국변호사들의 리서치나 판단을 아무런 분석이나 토론 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논리적인 사고와 기본적인 한국법 지식을 바탕으로 외국 고객이 제시한 사실관계와 쟁점을 한국변호사에게 정확하게 제시하고 합당한 결론이 도출되도록 돕는 게 외국변호사의 역할이다. 외국변호사가 한국변호사를 '지원'한다는 것은 서류 번역이나 영어 이메일 작성 등의 단순 업무 보조에서 더 나아가 이와 같이 정교하고 세밀한 작업을 수반하는 일이다.

이렇게 한국변호사의 영역을 존중하고 외국변호사의 역할이 어떤 태도와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하는가를 잘 숙지하고 업무에 임한다면 외국변호사가 자기 영역에서 스스로를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여 맡은 업무가 자신의 역량에 비해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 이유가 없다.

한국변호사와 일할 때 종종 업무에서 사용되는 한국법 용어나 개념들이 잘 이해되지 않아 가면증후군의 한 원인이 될 수 있는 자신감 부족이 느껴질 때에는 한국법에 대한 기본 체계를 세워 나가면 된다. 사실 외국변호사가 한국법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한국변호사들과 제대로 같이 일하기는 어렵다. 한국법의 작동 원리를 한국변호사와 외국변호사가 공유하지 않으면 두 그룹 사이에 원활한 팀워크가 형성될 수 없고 외국변호사가 존중을 받기도 어렵다. 이런 현상이 지속되면, 즉 외국변호사의 한국법 지식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아 원활한 팀워크가 형성되지 않으면 결국 외국변호사가 소외감을 느낀 채 업무에서 겉도는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다.

비자 취득, 수년간 몇 백 건 처리

자신감이 충만한 전문가의 경지에 도달하는 길은 같은 일을 다양한 각도에서 수없이 집중 반복하면서 업무를 확실하게 배우는 것이다. 나 역시 10년간 기업법무, M&A 분야에서 활동하다가 다국적기업 소속 외국 기업인의 한국 워킹 비자를 취득해주는 출입국관리 업무를 시작한 후 같은 유형의 업무를 수년간 몇 백 건 처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깊숙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자신감이 적어도 내 전문분야인 출입국관리 업무에서는 가면증후근 증상을 완전히 태워버렸다.

한국법 지식, 영어 리걸라이팅 능력 등 외국변호사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면, 자신의 업무에서 이룬 성과에 대해 주변인을 속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여지가 없고, 오히려 자신의 업무로 많은 가치를 창출하게 된다. 실제로 외국변호사의 영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르는 순간들이 있다. 고도로 정교한 영문 계약서의 작성이나 협상 또는 중요한 회의에서 외국 고객에게 영어로 의견을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등의 경우에는 외국변호사가 한국변호사들의 한국법 지원을 받으면서 전면에 나서야 할 때가 종종 있는데, 이런 중요한 순간에 외국변호사에게 부여된 특유의 역할을 잘 감당한다면 한국변호사 동료들의 존중을 받을 수 있고, 일하는 재미도 상당할 것이다.

한국 로펌에서 외국변호사는 비록 조연이 될 수밖에 없지만, '주연급 조연'으로 빛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 자신의 영역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에 걸맞은 역할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외국변호사의 기술을 제대로 보유하고 있다면 가면을 벗어 던지고 멋진 커리어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은정 외국변호사(법무법인 김장리, jun@kimchangl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