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외국변호사의 기술⑪ 스토리가 있는 이력서
[특별연재] 외국변호사의 기술⑪ 스토리가 있는 이력서
  • 기사출고 2023.07.10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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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적기업 소속 외국 기업인들의 한국 워킹비자 취득 업무를 전문분야로 하면서 지난 20년 동안 워킹비자 신청서와 함께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제출해야 하는 영문 이력서를 족히 1만 통 넘게 검토했다. 외국 기업인들이 보내주는 수많은 이력서 중에는 간혹 눈에 확 띄는 것들이 있다. 자연스레 좋은 이력서를 보는 안목이 생겼다.

좋은 이력서는 오탈자가 전혀 없고 모든 글머리 기호(bullet point) 들여쓰기의 정렬이 칼 같아서 깔끔하다. 단어 하나, 구두점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아 군더더기가 없이 날이 선 느낌이 들고, 간결하게 내용의 가독성을 높이는 등 이력서의 기본을 당연히 두루 갖추고 있다. 더 나아가 학력과 경력사항 하나하나가 일정한 통일성과 방향성을 유지하면서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려고 집요하게 노력해온 집념이 엿보이며 커리어에 대한 자부심이 뚝뚝 묻어난다.

◇은정 외국변호사
◇은정 외국변호사

거대 방산업체의 한국지사장으로 부임했던 미 공군 출신의 퇴역 투스타 장군, 조 단위 M&A 딜을 수시로 진두지휘했던 투자은행가, 다국적기업의 간부 양성 프로그램에 선발됐던 엘리트 사원, 난해한 IT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 실적을 올렸던 박사급 연구원 등 눈에 띄는 몇몇 걸출한 인재들의 이력서는 간결하지만, 단순 나열식을 벗어나 함축적인 자신만의 강렬한 스토리를 담고 있었다.

자신만의 강렬한 스토리 담아

그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국 유력 일간지의 한국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취재비자를 신청한 어느 미국 기자의 이력서였다. 그는 대학시절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학교신문 기자, 지역 신문사 인턴으로 저널리스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졸업 후 아시아로 와서 세계적인 경제신문사에 취직하여 유력 기자로 발돋움한 후 결국 한국특파원으로 발탁되었다. 그의 이력서는 이렇게 시작부터 끝까지 어떤 일관된 통일성과 방향성의 힘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실제로 작동되는 24캐럿 황금 변기를 주문 제작한 유명 사업가 등 괴짜 아시아 부호들의 인생사에 관한 기획기사 시리즈를 자신이 작성한 대표적인 기사로 소개한 것이었다. 단 두세 줄에 불과한 이 기발한 내용을 읽으면서 한 장짜리 이력서에 담긴 그의 인생 스토리에 확 끌렸다.

미국 로스쿨을 지망하는 인턴에게 영문 이력서에 관한 조언을 하면서 그 미국 기자의 '24캐럿 황금 변기' 스토리 컨셉을 설명해 준 적이 있다. 단순 나열식의 이력서 대신 임팩트있는 스토리가 담긴 이력서를 다시 만들어 오라고 주문하고, 10번 이상 수정하게 했다. 젊은 학생이 자신의 성장배경과 학력, 인턴십 경력만으로 이력서에 흥미로운 스토리 라인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지난한 자기탐구가 필요하다. 이런 작업을 거쳐야 이력서에 본인의 장점과 매력이 하나둘 부각될 수 있다.

'이력서 검토' 서류전형 담당

이력서를 보는 눈이 생기면서 우리 회사의 외국변호사 채용 시 1차로 이력서를 검토하는 서류전형 업무는 내 몫이 되었다. 주니어 외국변호사 포지션 지원자의 이력서를 검토할 때에는 지원자들이 외국변호사라는 직업의 성격을 잘 이해하는지, 특히 외국변호사 특유의 '기술' 보유 여부를 살피면서 한국 로펌의 인재상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한다. 외국변호사의 기술은 머릿속에 머무는 거시적인 담론 수준에서 벗어난, 한국에서 지속가능한 외국변호사의 커리어를 실제로 구현하는 각론적인 기술이며, 이러한 내용이 이력서에 표현되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 로펌의 외국변호사 채용담당자들의 주목을 끌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주니어 외국변호사들의 이력서를 볼 때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는지를 꼼꼼히 살핀다.

1. 학부 및 로스쿨 과정에서 영어 작문 실력을 기를 수 있는 과목들(writing classes)을 수강했는지, 그리고 영어 작문 실력을 얼마나 부각시키고 있는가를 살펴본다. 외국변호사의 가장 중요한 기술인 영어 리걸 라이팅 실력을 가늠하기 위함이다.

2. 영어 외에도 한국어가 능통한지 이중언어 능력을 확인한다. 영어를 아무리 잘해도 한글로 된 법률문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일상적인 한국어 대화가 어려우면 한국변호사 동료나 고객과의 협업, 소통을 하기 어렵다. 외국변호사가 외국계 회사 관련 일을 하더라도 한국 회사의 담당자들은 거의 전부 한국어가 더 편한 한국인 직원들임을 유념해야 한다.

한국어 능력도 확인

3. 법률번역 경험이 있는지, 그리고 기본적인 번역실력이 있는지를 파악한다. 외국변호사가 법률번역을 많이 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법률번역 기술이나 그러한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언어적 감각을 갖추고 있음을 어필할 수 있다면 채용담당자의 관심을 끌 수 있다.

4. 한국법을 공부한 경험이 있는지, 아니면 적어도 한국법 공부에 대한 관심이 있는지 확인한다. 외국변호사가 한국 로펌에서 하는 일은 대부분 한국법과 관련된 것이어서 한국법을 아예 모르거나 관심조차 없으면 지속가능한 한국 로펌 커리어를 만들어가기 어렵다. 한국 로펌 입장에서도 한국법 실력이 점점 늘지 않는 외국변호사는 활용도가 낮을 수 밖에 없다.

5. 영문계약 실무 경험 및 트레이닝 배경을 살핀다. 특히 자격국 로펌에서 다양한 종류의 국제 영문계약 실무 경험을 많이 쌓았는지, 또는 적어도 로스쿨이나 관련 교육기관에서 영문계약 실무 교육을 받았는지를 본다. 영문계약 실무 능력은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변호사를 자격국과 계속 연결시키는 외국변호사 본연의 기술이다.

6. 교포 변호사의 경우 한국변호사, 사무직원과 잘 융화할 수 있는 문화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지를 유심히 본다. 다른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한국의 직장문화와 한국식 업무방식에 잘 적응할 수 없으면 겉돌게 되기 마련이고 사무실에 큰 기여를 하기 어렵다.

한국식 업무방식에 적응할 수 있어야

이력서에 언급된 외국변호사의 기술을 실제로 보유하고 있지 않으면 인터뷰나 입사시험 과정에서 걸러질 수 있다. 그러나 한국법 지식 부족, 법률번역 기술 미숙 등 특정 기술이 아직 좀 부족하더라도 가장 핵심적인 영어 리걸라이팅 기술이 뛰어난 경우에는 한국법 공부를 시작하려는 의지, 법률번역에 대한 관심 표명 등 이력서에서 외국변호사의 기술 성숙도에 도달하려는 일정한 방향성이 감지되면 채용될 가능성이 있다. 지원자의 입장에서도 이력서에 주요 기술을 언급하면 아직 부족한 면이 있더라도 이는 기술 성숙도를 달성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만드는 원동력 내지 로드맵이 될 수도 있다.

한국 로펌의 외국변호사 커리어는 일반적인 미국변호사의 커리어와는 다른 대안적 법률 커리어(alternative legal career)이므로, 이력서 역시 그 대안적 법률 커리어에 걸맞게 필요한 배경과 기술이 잘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국 로펌의 외국변호사 채용담당자에게 어필할 수 있다.

자신만의 잠재된 매력이 묻어나는,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이고 강렬한 스토리가 담긴 이력서에 한국 로펌의 외국변호사 커리어에 필요한 기술을 잘 담아낼 수 있다면 성공적인 외국변호사 커리어의 첫 걸음이 될 수 있다.

은정 외국변호사(법무법인 김장리, jun@kimchangl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