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남순 변호사의 의로운 삶
홍남순 변호사의 의로운 삶
  • 기사출고 2006.10.1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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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위반 사건 도맡은 '긴급조치 전문변호사'5.18민주화운동에 참여…1년7개월 옥고 치르기도
(광주=연합뉴스) 14일 새벽 별세한 홍남순 변호사는 양심수 변론 등 인권활동과 민주화운동에 생애를 바친 광주의 어른이자 우리 시대의 의인이었다.

◇홍남순 변호사
1912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고인은 1933년 학업에 대한 열망으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4년 뒤 일본 왓카야마(和歌山)시립 상공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48년 제2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한 뒤 마흔의 나이에 참전하기도 했으며 1953년 부터 10년간 광주지법과 고법, 대전지법에서 판사를 지냈고 1963년 '호남민주화 운동의 산실'인 광주 동구 궁동 자택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이후 그의 삶은 한국 민주화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 했다.

한일협정 움직임에 맞서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 활동을 펼쳤으며 '호남푸대접 시정위원회', '3선 개헌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민주수호 국민협의회'등을 통해 반 군부독재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고인은 이와 더불어 1965년 한일협정 반대 발언으로 문제가 된 전 국회의원 유옥우 사건을 필두로 학생, 문인, 정치인 등 양심수들을 위해 60건 이상의 무료 변론을 맡아 '법 보다는 양심'을 중시하는 변호사로 명성을 얻었다.

특히 그는 1973년 전남대 '함성'지 사건, 1976년 3.1 구국선언, 1977년 시 '겨울공화국'으로 파면된 양성우 시인의 노예수첩 필화사건, 1978년 전남대 송기숙 교수 등의 교육지표사건 등 30여건의 긴급조치법 위반 사건을 맡아 '긴급조치 전문변호사'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였다.

5.18 민주화운동은 그의 삶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부분.

1980년 5월 20일 서울을 출발, 다음날에야 광주에 도착해 '피의 화요일'을 목격한 그는 같은달 26일 16명의 수습위원들과 함께 소위 '죽음의 행진'에 나선 것 때문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년 7개월간 복역 뒤 다음해 12월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석방된 뒤에도 그는 광주 구속자협회 회장, 5.18광주민중혁명기념사업 및 위령탑 건립추진위원장 등을 맡아 '끝나지 않은 5.18'의 진상규명과 시민들의 명예회복활동에 전력했다.

이 같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는 피해보상을 신청하라는 주위의 권유에 "죽은 사람들에게 부끄럽다. 내가 한 것이 뭐가 있느냐"며 신청을 거부해 지난해 뒤늦게 5.18 피해자로 인정되기도 했다.

그는 1990년대 후반부터 강연과 언론 기고를 통해 영 · 호남 지역감정 해소를 위해 앞장섰지만 2001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져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었다.

고인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해 온 박석무 단국대 이사장은 "홍변호사는 1970-1980년대 정말 어렵고 힘든 일들을 잘 감당해 낸 광주의 어른이자 우리 시대의 의인"이라며 "이제 세상 일은 다 잊고 영면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손상원 기자[sangwon700@yna.co.kr] 2006/10/14 03: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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