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대통령에 당선된버락 오바마의 법조 시절
美 대통령에 당선된버락 오바마의 법조 시절
  • 기사출고 2008.12.15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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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나와 인권변호사 외길…대통령 당선 기반 닦아유명 로펌 제의 뿌리치고 공익소송 수행하며, 시민곁으로
버락 오바마가 제44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인 그에게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기대를 걸고 있다.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그는 또 역대 미 대통령 중 26번째 변호사 출신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하버드 출신이지만, 정치적 고향인 시카고로 돌아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그의 법조 경력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 시카고 법대에서 헌법을 가르치기도 한 그의 법조 시절을 소개한다. 편집자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자
시카고의 지역 언론에 따르면, 오바마는 굉장히 글을 잘 쓰고, 현안에 대한 분석력이 뛰어난 변호사로 소개된다. 하지만 변호사로서 관여한 사건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변호사로 본격 활동한 기간도 길지 않은 편이다. 왜냐하면 1993년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으나, 불과 4년도 지나지 않은 96년 주 상원의원에 당선돼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4년간 3700여 시간 업무수행

한 통계에 따르면, 오바마는 정계에 입문하기 전 4년 동안 풀타임 변호사로 30여건의 사건을 다룬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오바마는 32세 되던 93년 시카고에 있는 '마이너, 반힐 & 갤런드(Miner, Barnhill & Galland)' 법률사무소에 합류했다. 인권과 인종차별 소송, 부동산 문제 전문으로 알려진 이 로펌에서 그는 모두 3700여 시간의 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오바마는 여기서 소송에 대해 개요를 준비하고, 교섭을 이끄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실제 법정에 나가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 사립연구소의 비리를 폭로한 내부 고발자를 위해 변호하고, 흑인 유권자에 대한 불평등한 투표제도의 개선 및 불공평하게 구획된 선거구 개편 등에 관한 사건을 맡아 승소하는 등 인권변호사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오바마는 근무시간의 70%를 투표권, 시민권, 고용문제 등에 대한 소송을 다루는 데 할애했다. 나머지 30%는 부동산계약, 법인 서류 정리, 이런저런 소송의 고객에 관련된 업무를 처리하는 데 시간을 썼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자가 2008년 1월 25일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열린 유세에서 부인 미셸 오바마와 함께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미소짓고 있다. 미셸도 하버드 로스쿨을 나온 변호사 출신이다.
그가 맡았던 대표적인 소송은 행동주의 그룹이 일리노이주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이들은 일리노이주를 상대로 당시 저조한 투표율을 개선하고 미비한 투표등록을 돕기 위해 고안된 연방법을 적용하지 않았다고 주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한 뒤 소송을 제기했다. 오바마는 다른 변호사들과 함께 행동주의 그룹을 대리해 승소를 이끌었다.

그는 또 일리노이주 쿡 카운티와 500만 달러의 연방연구보조금을 관리하는 사립연구소의 비리를 폭로한 내부 고발자를 위해 장문의 호소문을 작성하는 업무도 맡았다. 당시 마약을 복용한 임산부의 치료를 연구하는 데 쓰여진 이 보조금의 비용에 대해 의심을 품은 뒤 그 프로그램에서 해고된 의사가 밀고한 사건이다.

공익관련 사건서 두각

이 외에도 오바마는 공익 관련 사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은 것이다. 그가 맡았던 초기 사건 중 하나는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단지 계획을 추진한 비영리법인에 대한 변론이었다. 이 법인의 관리소홀로 인해 대상자에서 빠졌다며 한 개인이 제기한 소송에서 비영리법인 측을 대리했던 오바마는 비영리법인의 입장을 설득력 있게 제시해 소송을 각하시켰다.

오바마는 1990년 시카고의 시의원과 흑인 유권자들이 인구조사 후 새롭게 편성된 선거구가 불공평하다며 낸 소송에 다른 변호사들과 함께 참가했다. 항소심에서 새로 개편된 지도가 유권자들의 투표할 권리를 위반했다는 판결이 나면서 오바마 측이 승소했다. 이후 이 선거구는 합리적인 형태로 개편됐다.

오바마는 95년에는 스스로 이와 유사한 소송을 제기했다. 93년 제정된 연방자동차유권자법에 유권자들의 투표를 막는 불합리한 내용이 있다고 지적하며, 95년 법의 개정을 촉구한 것이다. 과거에 비해 쉽고 편하게 유권자로 등록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면서, 오바마는 시민들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데 기여하는 변호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오바마는 변호사로서 대부분 인권 또는 공익에 관련된 사건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 기간이 그의 정치활동에 도덕성 측면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큰 도움이 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그가 활동했던 '마이너, 반힐'은 인권과 저소득층 시민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힘을 쏟는 법률회사였고, 오바마 스스로 저소득층의 변호에 힘써왔다는 점에서 정치인으로서 유권자들의 신뢰를 얻고 좋은 활동을 펼치는 데 큰 힘이 됐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자가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 시절인 2006년 8월 31일 아프리카 지부티에 있는 미군부대를 방문해 미군들과 함께 농구경기를 하면서 튕겨나온 농구공을 리바운드하고 있다.
의 기자 출신으로 오바마의 '장자방'으로 불리는 수석전략가인 데이비드 액셀로드는 "오바마는 하버드 로스쿨 졸업 후 어느 유명 로펌이든 갈 수 있었지만, 인권변호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마이너, 반힐'을 선택했다"며, "그것은 결국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선택임이 입증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오바마가 인권변호사로 활동한 것은 그의 일생 전체를 통해 관통하는 철학과 가치에 따른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고객들 연 10만 달러 이상 후원

변호사로서의 활동은 선거자금을 모으는데도 큰 힘이 됐다. 마이너, 데이비스 등 로펌의 파트너들과 업무과정에서 알게 된 고객들이 오바마가 정계에 진출한 뒤 매년 10만 달러 이상의 정치자금을 내며 후원했다. '마이너, 반힐'의 대표변호사인 마이너는 오바마가 주 상원의원 선거에 나서고, 2000년 연방 하원의원 선거, 2004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할 때 오바마의 정치자금 모금을 위한 조직책을 맡아 각종 행사를 조직하고, 유명인사들을 오바마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수완을 발휘했다.

시민들의 삶과 생활환경을 개선하겠다는 포부를 품고 인권변호사가 된 오바마의 철학은 정치인이 되어서도 꾸준히 이어졌다. 그는 주 상원의원이 된 뒤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공화당의 감세법안에 저소득층 가정의 감세를 포함시키도록 공화당 의원들을 설득해 수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또 선거자금 개혁 법안을 통해 과도한 선거자금을 줄이는 데도 기여했다. 유아기 교육프로그램 확장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고, 고리대금업자들이 저소득층 주택 소유자들에게 과도하게 높은 주택담보 이자율을 부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주목을 받았다.

오바마는 한 인터뷰에서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대부분 공화당원들과 힘을 합쳐 해냈다"고 밝히며, 저소득층이나 서민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정책들을 입안하고 법안으로 통과시킨 일을 매우 자랑스러워 했다.

김홍국 뉴시스 기자(archomme@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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