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의 아메리칸 드림
오바마의 아메리칸 드림
  • 기사출고 2008.12.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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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으로 차별 떨쳐내고 '변화와 희망'의 꿈 실현갈등 해소, 세계 경제위기 풀어갈 새 리더십 주목
미국 역대 대통령 및 대통령 출마자 중에는 변호사 출신들이 많았다. 이번 대선에서 승리함으로써 미국에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버락 오바마도 미국의 명문 법대를 나와 변호사 생활을 했다. 이런 오바마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어떠한 삶을 거쳤으며, 어떻게 정치에 입문하여 상원의원이 되었을까.

흑인 아버지, 백인 어머니

◇오바마 미 대통령 당선자
버락 오바마의 삶은 아메리칸 드림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복잡한 가계(家系)의 혼혈 흑인이다. 아프리카 케냐 유학생인 아버지와 미국 중부 캔자스주 출신 백인 어머니 사이에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오바마의 조부모는 케냐에서 영국인의 하인이었으며, 오바마의 아버지는 부모와 함께 염소를 키우면서 살았다고 한다.

오바마가 두 살 되던 해 하버드대 경제 대학원에 공부하러 간 아버지는 어머니와 헤어졌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곧 케냐로 돌아갔다. 이후 오바마는 인도네시아로 간 어머니를 따라 유년 시절 4년간을 인도네시아인 의붓아버지와 함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보냈으며, 이 때 오바마는 이슬람교 학교와 가톨릭 학교를 2년씩 다니게 된다.

십대 성장기에 들어 오바마는 부모와 떨어져 하와이에 살던 외조부모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오바마는 얼마전 작고한 외할머니 매들린 던햄의 손에서 자랐다. 하와이의 명문 사립학교 푸나호우(Punahou School)에 진학했다.

오바마는 하와이로 돌아오면서 인종차별 및 인종간 분열에 대하여 혼란을 겪게 되고 이런 과정에서 술과 마약에 손을 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경을 겪으면서도 푸나호우에서 3명밖에 없는 흑인학생의 한 명으로서 우등상을 받고 졸업했다. 결국 오바마는 이러한 복잡한 환경과 여건 때문에 청소년기에 혼란과 방황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본인의 사상을 굳히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대학때부터 정치활동 열심

1979년 로스앤젤레스의 옥시덴털대(Occidental College)에 입학한 오바마는 대학 농구 선수로 활약하면서 흑인 학생들과 정치 동아리를 만들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을 규탄하는 집회를 개최하는 등 정치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그러나 오바마의 야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1981년에는 아이비리그 (Ivy League)인 컬럼비아대(Columbia University)에 편입하여 이곳에서 정치학과 외교학을 수도승처럼 공부했다고 한다.

컬럼비아대 역시 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기업고객에게 국제적 사업정보를 제공하는 Business International Corporation라는 회사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 이후 1985년에는 일리노이주의 시카고로 가서 Roseland라고 하는 빈민 지역에서 자원운동가로 활약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기업 및 비즈니스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고, 또한 사회활동을 하면서 공익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어쩌면 그가 법대에 진학하게 된 동기는 기업에서의 경험보다는 공익적인 사회활동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법대들은 이러한 정치, 사회적 경험이 풍부한 학생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오바마는 1988년 9월 하버드대 법과대학원(Harvard Law School)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후의 사회생활과 경험 때문에 다른 법대생들보다 대략 4~5살 정도 나이가 많았지만, 여러 경험을 바탕으로 리더십을 인정받게 되었다.

오바마는 1990년 법조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법률 학술지 '하버드 로 리뷰(Harvard Law Review)'의 편집장으로 선출된다. 하버드대 설립 104년 만에 첫 흑인 편집장의 탄생이었다. 이렇게 법대에서 만났던 친구들은 이후 오바마의 정치활동 및 대통령 선거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다방면에서 큰 도움을 주게 된다.

법대 친구들 대선때 중요 역할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뒤 다시 시카고로 건너 간 오바마는 마이너, 반힐 앤 갤런드(Miner, Barnhill & Galland)라는 로펌에서 인권변호사로 일하면서 흑인 인권 향상과 주거 환경 개선에 앞장섰다. 그는 인권변호사로서 특히 많은 인종차별사건을 대리하였고, 이런 과정에서 공익활동 및 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은 더욱 깊어져 갔을 것이다.

시카고의 지역 사회 활동가로 일한 경험과 로스쿨에서 공부한 사회구조와 법제도에 대한 지식을 통해 오바마는 한층 더 성숙해 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흑인의 열등감이나 자폐적 자의식 따위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그는 지금의 아내 미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시카고 대학의 헌법학 강의를 맡으며 교수생활도 시작했다.

이런 유년시절의 배경, 학창시절 경험 및 사회생활을 토대로 오바마는 더 큰 무대를 꿈꾸게 되었다. 더 좋은 사회,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그 시대에 맞는 바람직한 법과 규정을 제정하는 것이 많은 정치인들의 희망이라는 점에서 많은 법조인들이 정치인생을 고려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오바마는 1996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2000년엔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이 당시 하원의원 프라이머리에서 패배한 39살의 오바마는 변호사로서 돈과 신용 모두를 잃었다고 하며, 슈퍼 대의원은 고사하고 일리노이주 민주당 대의원에도 포함돼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2년 뒤인 2002년에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3선에 성공하였다.

일리노이는 링컨의 주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리노이는 링컨의 주(州)이며, 에이브러햄 링컨은 그 당시 노예제도를 없애고 백인과 흑인간의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하려고 힘썼던 인물이다. 오바마도 현재 미국인들 간에 갈등을 해소시키고 경제를 살려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서 대통령의 직책을 맡았다고 할 수 있다. 법조인으로서 그가 어떠한 방식으로 정치를 펼쳐 나갈 것인지, 어떠한 성과를 이루어 낼지 매우 궁금하다.

그간 오바마가 법조인으로써 또 입법부에서 이뤄 낸 성과에 비추어 이제 미국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어떠한 면모를 보여줄지 기대된다.

미국의 언론들은 "그는 미국을 빛낸 위인의 삶에서 통찰력과 영감을 얻었다"라고 분석하고 있다. 링컨, 케네디, 마틴 루터 킹 등은 오바마의 비전과 정치적 감수성의 한복판에 있다고 한다. '연설의 연금술사'라는 오바마는 이들로부터 대중 동원 방식과 설득의 전략을 습득했다. 링컨으로부터 통합의 리더십을, 케네디로부터 변화와 세대교체를, 킹 목사로부터는 차별없는 사회의 메시지를 배웠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변화와 희망'이라는 그의 정치 브랜드가 더욱 다듬어지고, 경쟁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과 8년 전 혼자 렌터카를 몰고 어렵사리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장을 찾아갔던 젊은 변호사 오바마. 이제는 전세기 옆면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채 대회의 주인공이 돼 무대를 밟게 되었다. 인종에 대한 혼란과 갈등을 겪으면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법조인 및 사회활동가로서 열정적인 삶을 살아온 오바마가 그 어느 때 보다도 새로운 리더십이 요구되는 이 시대에 어떠한 미국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할지 기대된다.

◇임석진 미국변호사는 미 브라운대와 콜럼비아 대학원, 보스톤 칼리지 로스쿨과 런던대 킹스 칼리지 로스쿨을 나왔습니다. 법무법인 김 · 장 · 리에서 미국변호사로 활약중입니다.

본지 편집위원(sjlim@kimchangl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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