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 20주년에 부쳐
헌법재판소 20주년에 부쳐
  • 기사출고 2008.09.04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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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웅 연구관]
오늘날 헌법은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오고 있으며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이명웅 연구관
국민의 인권의식은 매우 높아졌고, 국회가 입법을 할 때나 정부가 법집행을 할 때 공권력이 헌법에 위반되는지 빈번하게 논의된다. 헌법소원, 위헌법률심판, 권한쟁의는 이제 친숙한 구제수단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헌법소송의 차원을 넘어서 최근에는 다양한 개헌론이 사회 각층에서 논의되고 있다.

헌법이 과거의 권위주의 정부 하에서 장식적이고 선언적인 측면에서 벗어나 이제는 모든 국가기관에 그 규범적 힘을 미치고 국민의 생활규범으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는 아무래도 헌법재판소의 적극적 활동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민주화 운동의 산물

1988년 개정된 제9차 헌법은 1987년 6월의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오랜 권위주의와 형식적 법치주의의 어두운 터널을 통과한 뒤 나타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성숙한 작품이었다.

당시 헌법개정은 대통령 직선제의 관철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우리 국민들은 더 이상 국민의 인권이 훼손되지 않고 국가권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독립된 헌법재판소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선택은 2차대전 후 인권보장을 위한 헌법재판이 강화되는 세계적 조류를 타는 것이었으며, 아시아에서 선두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예외 없이 독립된 헌법재판소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도 올 8월 위헌법률심사제를 도입했다. 영국도 2009년 독립된 대법원의 설립을 통하여 EU의 사법제도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몽골, 태국,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한국의 뒤를 이어 독립된 헌법재판소를 두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초기에 그 위상과 사건의 범위에 있어서 제약적인 요소가 적지 않았지만, 조규광 소장을 비롯한 1기 재판부가 국민의 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헌법의 규범력을 확대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1989년 1월25일 선고된 첫 사건이 '민사소송에서 국가 측에는 가집행을 불허하는 규정이 위헌'이라는 결정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 후의 재판부에서도 그러한 전통이 발전되어 왔다.

그간 헌법에 저촉되는 수많은 법률조항들이 위헌선고를 받았으며, 많은 공권력 작용 혹은 부작위가 국민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결정을 받은 것에서 그러한 자취를 볼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지금까지 대통령 탄핵이나 행정수도 이전 사건과 같은 큰 사건을 통하여 특별히 관심의 이목이 집중되었으나, 많은 일상적인 사건에서도 국가의 법질서와 공권력작용이 헌법적 가치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묵묵히 가려왔다.

가장 신임받는 국가기관

그 과정에서 정치적 사건에 대한 소극적 자세라거나, 재산권에 대한 과잉보호라거나, 국회의 민주적 의사에 대한 지나친 간섭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헌법정신을 구현하려는 헌법재판소의 노력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왔으며, 그 결과 한 일간신문이 매년 실시하는 주요기관의 영향력 설문조사에서 지금까지 헌법재판소는 국가기관 중 가장 신임받는 기관으로 인정되어 왔다.

헌법재판소의 20주년은 이제 우리나라에서 헌법재판이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한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가 성숙되고 한편으로 국민들의 이해관계가 점점 더 복잡하게 얽힘에 따라 중요한 의사결정을 위한 논의와 분쟁의 객관적 척도로서 헌법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사회는 원칙과 질서가 확고히 자리 잡지 못하고 공정과 정의가 부족한 측면을 적지 않게 지니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그런 상황 속에서, 무엇이 원칙이고 바람직한 질서인지, 자유와 평등을 조화시키면서 복지를 구현할 수 있는 정의로운 길이 무엇인지, 법치주의를 통한 민주주의 발전을 어떻게 지향할 것인지를 묵묵히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한편으로 헌법재판소만의 작업이 아니라는 점에 우리는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국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헌법재판제도가 존재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헌법을 실현하는 일차적 주체는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사회적 이목이 집중되는 사건들 때문에 헌법재판소에 관심이 집중되지만, 헌법재판소는 법률이나 국가작용이 헌법이 정한 최소한의 커트라인을 넘었는지 여부만을 심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설사 합헌결정이 있었다고 해도 통상 이는 그것이 바람직한 입법이라는 뜻은 아니다. 커트라인, 예컨대 40점을 넘은 데서부터 100점 만점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입법을 통하여 정의를 실현하고 국민의 인권을 최대한 보호할 것인지는 바로 입법부에 달려있는 것이다.

입법 정의 실현 국회 몫

이를 위해서는 공정한 선거절차, 국회의원들의 헌법적 사명감, 당내 민주주의의 발전, 합리적 토론과 설득의 문화,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한편 국민들의 일상생활에서도 헌법정신의 구현은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된다. 타인을 존중하고 관용하는 것, 자신의 자유를 중시하면서도 책임을 지는 것,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공공선을 추구하는 정신, 개인의 권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수용과 같은 헌법적 가치는 개인의 삶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건강한 민주적 시민이 있을 때, 민주적인 정부는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헌법재판소의 역할은 개개의 사건을 통하여 무엇이 우리 시대의 헌법정신인지, 어떻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한지, 헌법이 상정한 국가권력질서가 어떻게 바람직하게 유지될 것인지를 묵묵히 선언해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도 해가 갈수록 헌법재판소가 국민들의 더욱 든든한 파수꾼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명웅 헌법재판소 부장연구관(mulee9@ccour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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