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포이즌 필' 제도
일본의 '포이즌 필' 제도
  • 기사출고 2008.06.11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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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 방어 인기수단…외국인 투자 위축 논란상장기업 16%서 도입…주가하락 우려 폐지 기업도
일본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기업의 외국인 지분이 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2003년 미국계 펀드가 동경증권거래소 2부 상장업체에 대하여 적대적 M&A를 시도하자 일본사회는 적대적 M&A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상호출자에 의한 주식상호보유제도나 신주의 제3자 배정 방식제도 등을 경영권 방어수단으로 사용하여 왔다. 그러나 이들 제도만으로는 경영권 방어에 한계가 있다는 우려에 따라, 신주예약권제도 등을 도입하였다.

◇임석진 미국변호사
일본 내 주식거래소에서 '포이즌 필'이라는 다소 생소한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초다. 인터넷 업체인 라이브도어의 청년 사업가 호리에가 미국계 투자은행인 리먼 브라더스로부터 800억 엔의 자금을 지원받아 거대 미디어 그룹 후지산케이그룹에 맞서서 자회사인 니뽄방송을 인수하려고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니뽄방송 M&A선 부정적 입장

그러나 일본 법원은 경영권 방어를 위한 방편으로서의 신주예약권제도의 활용에 대하여 초기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니뽄방송이 라이브도어를 배제하고 신주예약권을 발행하여 추가지분을 확보하려 한 시도는 현 경영진의 지배권을 유지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불공정한 발행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나아가 니레코가 사전방어 목적으로 신주예약권을 발행하였던 사건에서는, 기존주주에게 한도를 넘는 손해를 발생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현저히 불공정한 발행이라 판시한 바 있다.

이 당시 회사 · 증권 분석가들은 일본정부의 기업경영권 방어책 도입 방안에 대해 기업의 효율성 제고 노력을 감소시켜 장기적으로 일본 기업들의 가치를 저조하게 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고, 일본 기업들이 주주들의 뜻과는 달리 자기들을 방어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기업에 대한 외국인 지분율은 1992년 6%에서 2006년 28%까지 급증한 반면, 시가회계제도의 도입 등으로 인해 일본계 대주주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비율은 1992년 46%에서 2004년 24%로 떨어졌다. 외국 자본의 적대적 M&A로부터 일본 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신회사법 '포이즌 필' 허용

이에 일본 정부는 2005년 회사법제현대화법(이하 '신회사법')을 제정, 자국 기업들의 적대적 M&A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을 대폭적으로 도입했다. 현행 일본 신회사법은 경영권 방어를 위한 황금주와 복수의결권주, 포이즌 필을 허용하고 있다. 일본의 회사법 개정안은 외국자본에 의한 적대적 M&A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던 일본 기업들의 경영권 보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2005년 초에 있었던 라이브도어 건이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의 자금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도 신회사법 법제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5월 돈까스 소스 제조업체인 불독소스가 미국계 사모 펀드인 스틸 파트너스의 M&A 표적이 됐다. 이 사건에서, 우리의 대법원에 해당하는 일본 최고재판소는 포이즌 필을 활용하여 스틸 파트너스를 제외한 기존 주주들에게만 신주예약권을 발행하여 경영권 방어에 나선 불독소스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일본의 최고재판소는 불독소스가 포이즌 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해달라는 스틸 파트너스의 항고를 기각했다.

불독소스는 적대적 M&A에 대한 방어책으로 신주예약권을 실현한 일본 최초의 기업이 되었다. 불독소스는 스틸 파트너스의 주식공개매수에 대응해 2007년 7월 스틸 파트너스를 제외한 모든 주주를 상대로 한 주당 3주의 신주예약권을 배당하여 방어책을 발동하였다.

스틸 파트너스가 확보하고 있는 지분율을 10.52%에서 2.86%로 끌어내리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에 대하여 일본 법원은 스틸파트너스를 '기업 가치를 손상시킬 수 있는 남용적 매수자'로 규정하는 판결을 내렸고, 동경 고등재판소의 2심에서도 같은 판결이 내려졌다. 이어 최고재판소가 스틸 파트너스의 항고를 기각한 것이다.

2004년까지만 해도 일본 기업 중에 포이즌 필을 도입한 기업은 2개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불독소스 사건 이후 일본 내에서 포이즌 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일본 내 전체 상장 기업의 16%에 달하는 634개 상장 기업이 정관에 포이즌 필 규정을 마련하고 있다고 한다.

각국서 투자보호주의 철폐 압박

이는 포이즌 필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 상장 기업 중 '포이즌 필 조항'을 갖고 있는 기업이 8.5%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일본 기업들이 경영권 방어를 위한 포이즌 필의 도입에 매우 적극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각국의 투자보호주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면서 일본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영국계 헤지펀드인 The Children's Investment Fund Management LLP가 일본 최대 전력 회사인 J-Power의 보유 지분을 높이려다 공공질서 유지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일본 정부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한 이래, 유럽연합은 일본에 대해 투자보호주의를 철폐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미국 최대의 공적 연금으로 대표적인 '큰 손'으로 꼽히는 캘리포니아주 공무원 퇴직연금(CalPERS)은 영국 최대의 연금 운용회사와 캐나다 최대의 기관투자가 등을 포함한 6개 투자펀드와 공동으로 일본의 상장기업 500여개사에 대해 M&A 방어제도 철폐 등을 포함한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골드만삭스는 작년 말 낮은 투자 수익률과 높아진 기업 M&A 방벽에 실망한 헤지펀드들이 일본으로부터 빠져나가 아시아 시장으로 향하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특히 일부 일본 기업들이 국제 유가 상승 등과 같은 경영환경 악화 상황에서도 경영 개선을 위한 노력에는 소극적이고 오로지 경영권 보존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자, 해외 투자자들뿐만 아니라 일본 내 일반 투자자들까지도 이러한 기업의 행태에 불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특히 불독소스가 스틸 파트너스에 대해 21억 엔이라는 거액을 화해금으로 지불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경영진이 자신의 경영권만을 수호하기 위해 회사와 주주에게 과도한 부담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을 반영하듯, 이사회의 결의만으로 포이즌 필을 발동할 수 있도록 한 정관을 개정하여, 주주총회의 결의를 통해서만 포이즌 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노무라증권이 발간한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 2년 동안 시세이도를 비롯한 일본 기업 12개사는 주가 하락의 우려 등을 이유로 포이즌 필 조항 자체를 정관에서 아예 삭제했다. 지난 4월 30일 포이즌 필을 삭제한 시세이도의 경우 발표 직후 주가가 7% 상승했다. 포이즌 필의 폐지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이를 포이즌 필에 대한 시장의 부정적 인식의 표출이라 주장하고 있다.

'포이즌 필' 등 재검토 가능성 논의

파이낸셜타임즈의 보도에 의하면, 일본 정부는 해외 자본의 국내 투자를 확대하기 위해 법인세를 인하하는 등의 각종 투자제한 법규들을 완화하기로 결정했다. 그 일환으로 포이즌 필을 비롯한 경영권 방어제도에 대한 재검토 가능성도 논의되고 있다.

또 기존 대주주가 싼 값에 지분을 늘릴 수 있는 편법으로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러한 제도를 도입한 회사에 대하여는 일본 증권거래소에서 심사를 엄격하게 하고, 문제가 있으면 상장폐지를 시키는 등의 보완책도 마련했다.

경영권 방어를 위해 도입된 포이즌 필이 외국인 투자를 위축시키는 등 부작용이 없지 않아 보완책 논의가 분분한 게 일본이다.

◇임석진 미국변호사는 미 브라운대와 콜럼비아 대학원, 보스톤 칼리지 로스쿨과 런던대 킹스 칼리지 로스쿨을 나왔습니다. 법무법인 김 · 장 · 리에서 미국변호사로 활약중입니다.

본지 편집위원(sjlim@kimchangl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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