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은 법의 선언을 넘어서서 삶을 변화시키는 촉매제"
"판결은 법의 선언을 넘어서서 삶을 변화시키는 촉매제"
  • 기사출고 2023.07.20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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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준 대법관 취임

권영준 대법관이 7월 19일 취임했다. 이에 앞서 권 대법관은 18일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의원 265명 중 찬성 215명, 반대 35명, 기권 15명으로 국회 인준을 받았다.

다음은 취임사 전문이다.

존경하는 대법원장님과 대법관님들, 그리고 법원 가족 여러분, 여러모로 부족한 저를 이렇게 환대해 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황송하고 감사합니다. 아울러 수해로 많은 분들이 피해를 입으신 가운데 취임식을 치르게 되어 송구스러운 마음입니다. 유가족과 피해자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법원은 제게 고향 같은 소중하고 애틋한 곳입니다. 저는 17년 전에 법원을 떠났지만 '우리 법원'이라는 말은 제 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돌아와 보니 늘 이곳에 머물렀던 느낌마저 들어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한편 저보다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제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민망하고 송구스럽습니다. 그 깊은 부채 의식을 동력 삼아 겸손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대법관의 책무를 수행하고자 합니다.

◇권영준 대법관이 7월 19일 취임사를 하고 있다.
◇권영준 대법관이 7월 19일 취임사를 하고 있다.

법은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법관은 법의 원리를 다룰 뿐 아니라 실존하는 사람들의 삶을 다룹니다. 재판기록은 단순한 서류뭉치가 아니라 삶의 눈물과 땀방울입니다. 법정은 법적 논리뿐만 아니라 삶의 절절한 호소가 오가는 곳입니다. 판결은 법의 선언을 넘어서서 삶을 변화시키는 촉매제입니다. 따라서 법과 삶은 건강한 상호 작용을 통해 중재되어야 합니다. 법에 관한 담론은 다채로운 삶의 목소리를 조화롭게 담아내야 합니다. 이러한 법과 삶의 원리를 마음 깊이 담아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겠다는 결심을 해 봅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삶의 목소리를 경청하겠습니다. 소수의 목소리가 다수의 함성에 묻히지 않도록 살피겠습니다. 법이 모든 국민의 삶에서 가치와 생명력을 획득하도록 미력이나마 기여하겠습니다.

묵묵히 자신의 책무를 수행하시는 법관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법관은 갈채를 받기 어려운 숙명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총천연색의 진실을 의도적으로 흑백의 이미지로 바꾸고, 법 원칙에 기한 판결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며, 옳고 그름에 대한 진지하고 세밀한 성찰보다는 선악에 대한 도식적이고 자극적인 프레임이 널리 소비되는 현실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법관은 고독 속에 인내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법관의 일은 우리의 삶을 걸 만큼 멋진 일입니다. 우리의 삶은 삶을 통해 추구하는 가치만큼 위대합니다. 진흙탕 같은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연꽃 같은 정의의 가치를 구현하고자 몸부림치는 법관 여러분은 참 멋진 분들입니다. 부족한 제가 그러한 분들과 하나의 팀이 되어 연대하고 전진할 수 있어 영광스럽습니다.

국민과 법원을 위해 봉사하시는 법원 직원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돌이켜 보면 법관 시절 저를 도와주시던 직원들이 없었다면 저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구석구석에서 국민을 위한 사법부를 위해 애쓰시는 그분들은 제게 숨은 영웅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민원의 홍수 속에서 의연하게 대응하시는 모습을 보며 애틋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부디 힘내시기 바랍니다. 삶의 어떤 장면에서는 누구나 순식간에 약자로 전락할 수 있듯이, 법원을 찾아오시는 분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약자입니다. 품위 있고 친절한 태도는 법원을 찾는 그분들의 절실한 마음을 따뜻함으로 적실 것입니다.

취임식 하루만 좋다는 그 대법관 생활을 오늘 시작합니다. 제 부족함으로 인해 무척 두렵지만, 법의 정신을 향한 구도자로서의 새로운 여정이 기대되기도 합니다. 주권자인 국민께서 부여하신 사법권의 진정한 의미를 매일 곱씹겠습니다. 반복되는 익숙한 풍경도 끊임없이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겠습니다. 위대한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되 때로는 그 위대한 전통을 거부함으로써 그 전통에 충실하겠습니다. 타인의 말에 겸허하게 귀 기울이되 타인의 갈채와 비난에 일희일비하지 않겠습니다. 국민 앞에 낮은 마음과 법을 향한 높은 이상을 가지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2023. 7. 19.
대법관 권 영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