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외국변호사의 기술④ 외국변호사는 왜 한국법을 공부해야 하는가?
[특별연재] 외국변호사의 기술④ 외국변호사는 왜 한국법을 공부해야 하는가?
  • 기사출고 2023.01.06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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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법이란 소프트웨어 없이 영문 계약서 등 하드웨어 제대로 작동 불가"

어소 변호사 1년차가 끝나가던 시절, 하루는 한국법 쟁점이 많은 영문 의견서를 작성해 파트너 변호사에게 넘겨준 후 받은 피드백이 좋지 않았다. 한국 어소 변호사의 국문 리서치를 바탕으로 외국 고객사 사내변호사를 위해 영어로 작성한 의견서였다. 파트너 변호사가 빨간 펜으로 잔뜩 첨삭한 초안을 다시 주면서 내가 한국법 이해도가 떨어져 관련 내용을 소화해 온전히 풀어내지 못했다고 신랄하게 비평했다.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 입학

나름 열심히 했는데도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니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어떻게 할지 고민해보니 답은 자명했다. 한국법을 공부해야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무실 도서실에 있는 민법, 상법 입문서를 틈틈이 읽으면서 한국법 기초를 닦기 시작했고, 그 후에는 아예 더 체계적으로 공부할 마음으로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입학해 3년 정도 한국법을 공부했다.

◇은정 외국변호사
◇은정 외국변호사

당시 방송대는 매 학기마다 기말고사를 봤다. 방송대는 본교 캠퍼스에 시험장이 마련되지 않아 매 학기 말 주말에 평소 가보지 않은 서울 변두리의 학교들에 마련된 임시 시험장들을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낯선 학교 교실에서 다른 방송대 학생들과 모여 시험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공부하면서 한국법 이해도가 올라가니 자연스럽게 업무의 퀄리티도 높아졌다. 적어도 '한국법을 잘 모르는, 변호사 아닌 번역사'라는 얘긴 듣지 않게 됐다. 한국법 쟁점으로 치열한 토론을 할 때 내가 밀리지 않고 의견을 제시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하자, 동료 한국변호사들도 나를 더 존중해줬다.

한국법 공부에 심취하자 내가 사법시험을 준비한다는 헛소문이 사무실 내에 퍼져 파트너 변호사들에게서 "은 변호사님, 사법시험 공부하세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기도 했다. 사실 사법시험을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해본 적이 있었는데, 90년대 후반이었던 당시 사법시험 합격률이 워낙 낮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려대서 금융법 석사학위 취득

방송대 법학과는 졸업하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고려대 법무대학원 금융법학과 석사과정에 진학해 M&A 계약의 한국법 쟁점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금융법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법 공부는 필자가 25년째 한국 로펌에서 외국변호사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었던 큰 원동력이 됐다. 사실 외국변호사가 자격국의 라이선스를 취득하기까지 미국변호사의 경우 학부 4년, 로스쿨 3년, 바시험(bar examination) 등 거쳐야 할 과정이 길고 험난하다. 그런데도 한국 로펌에서 제대로 일하려면 한국법까지 공부해야 한다고 권고하면 마음내키지 않을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한국 로펌의 외국변호사 커리어는 규격화되지 않은 대안적 법률 커리어(alternative legal career)이므로 외국변호사가 한국 로펌에서 일하기 위해 반드시 한국법을 공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라고 강요할 사람도 없다. 그리고 하고 싶으면, 그냥 민법 입문서를 틈틈이 읽고 수박 겉핥기 식으로 하든, 대학원에 진학해 제대로 공부하든 자기가 정한 방식대로 공부하면 된다.

그렇지만 한국법을 제대로 공부하면 그만큼 얻는 게 많기 때문에 나는 후배들에게 한국법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라고 적극 권유한다. 공부도 때가 있으니 되도록 젊을 때 시작하는 게 좋다.

한국법 공부의 혜택

한국법을 공부하면 얻는 혜택이 많다. 첫째, 영어로 커뮤니케이션해야 하는 대상인 한국법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 실무를 깊이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만큼 같이 일하는 한국변호사들이 더 존중해주고 대우해준다. 사실 한국법을 잘 모른 채 한국법 리서치를 단순 영문 번역만 하는 외국변호사는 피상적인 결과물밖에 내놓지 못한다. 한국법을 모르면 한국변호사가 어떤 사안에 대해 한국법 리서치를 정리해줘도 행간의 의미를 놓치기 쉽고 일의 본질적인 핵심에 다가갈 수 없다.

둘째, 업무 만족도가 올라간다. 업무의 대상이 되는 한국법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영어로 옮기는 작업만 하면 법률번역사 노릇밖에 못하면서 겉돌게 되어 욕구불만이 생긴다. 한국법을 모르면 그나마 법률번역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영어로 옮겨지는 한국법 내용을 100% 이해하는 것과 두루뭉술하게 이해하는 것의 업무 만족도는 천양지차다. 필자는 한국법 내용을 100% 이해하고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 후 한국법 의견서를 영문화하는 과정에서 종종 희열을 느꼈다.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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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변호사가 한국법 토양에 탄탄한 뿌리를 내리면 한국법에 기반한 국제법무 전문가로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다. 한국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한국에서 외국변호사로 커리어를 오랫동안 이어가기 힘들다. 이는 특히 한국법의 규율을 받는 외국 기업의 국내 사업이나 투자활동에 관한 국제법무를 처리해야 하는 외국변호사의 경우 특히 중요한 문제다.

사내변호사도 한국법 제대로 알아야

외국계 기업의 사내변호사로 활동하는 외국변호사도 한국법을 제대로 알아야 회사가 고용한 외부 한국 로펌의 쟁쟁한 한국변호사들에게 제대로 일을 맡기고 업무를 관리하며 법률비용을 통제할 수 있다.

물론 외국변호사가 한국변호사만큼 한국법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주어진 사안에 관한 한국법 쟁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본 지식, 그리고 그 법률 쟁점으로 한국변호사와 토론하고 함께 결론을 내린 후 업무를 추진할 수 있는 능력은 갖춰야 한다. 나아가 영미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국제거래 및 국제계약 관련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 외국변호사의 영미법 지식을 한국법 지식과 결합하여 한국과 연결점(nexus)이 있는 거래와 계약을 능숙하게 조망하고 처리할 수 있는 국제법무 전문가로 발돋움하기 위해선 기본적인 한국법 지식이 필수적이다.

지난 25년간 한국에서 외국변호사로 일하면서 필자가 주위에서 본 외국변호사들 중 한국법 기본기를 다진 외국변호사들은 대체로 로펌에서든 기업에서든 연차에 맞게 계속 중책을 맡으며 커리어가 잘 성장했다. 반면 한국법을 등한시했던 외국변호사들은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이 왠지 커리어가 불안정했다. 외국변호사라도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한국법 관련 일을 한다면 한국법은 공기와 같은 것이다. 공기 없이 인간이 생존할 수 없듯이, 한국의 외국변호사도 한국법을 등한시하면 장기간 지속가능한 외국변호사 커리어를 만들어가기 어렵다.

한국 로펌에 처음 입사한 주니어 외국변호사가 한국 로펌 특유의 외국변호사 업무체계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법률번역 업무, 영어 리걸 라이팅(legal writing)을 활용한 한국법 의견서 영문화 업무, 영문계약 실무 등 외국변호사 고유의 업무로 바쁜 와중에 한국법까지 새롭게 공부하려면 벅찰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외국변호사가 한국 로펌에서 하는 어떤 업무든 그 기반은 한국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왜 한국법을 공부해야 하는지가 자명해진다. 한국법이란 소프트웨어 없이는 한국법을 기반으로 영문으로 작성되는 번역문, 의견서, 계약서 등의 하드웨어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

은정 외국변호사(법무법인 김장리, jun@kimchanglee.com)

◇은정 외국변호사는 누구=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변호사 중 한 명인 은정 외국변호사는 USC 로스쿨(JD)을 나와 1996년 캘리포니아주 변호사가 되었으며, 1998년부터 김장리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민 · 국적 업무에 탁월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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