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외국변호사의 기술② 외국변호사는 번역사인가?
[특별연재] 외국변호사의 기술② 외국변호사는 번역사인가?
  • 기사출고 2022.11.01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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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한 법률번역 기술 보유한 국제법무 전문가 지향해야"

25년 전인 1998년 초, 필자가 국내 로펌에 외국변호사로 취직해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올 때 지인이 "외국변호사들은 한국 로펌 가면 '번역사' 노릇한다던데 잘 가는 거야?"라고 다소 김새는 말을 했다.

25년이 지난 2022년, 링크드인(LinkedIn)을 통해 외국변호사의 직장생활 및 커리어에 관해 꾸준히 포스팅을 하기 시작하면서 외국 로스쿨 학생들로부터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외국변호사들은 국내 로펌에서 번역만 하나요?"라며 진로에 대한 불안감이 느껴지는 질문이 종종 올라온다.

◇은정 외국변호사
◇은정 외국변호사

4반세기나 지났는데 왜 아직까지도 같은 질문이 반복될까?

외국변호사 커리어는 '대안적 법률 커리어'이다

그 이유는 일반인은 물론 외국 로스쿨 학생과 심지어는 일부 외국변호사마저 그 직업적 특이성 및 희소성으로 인해 국내 로펌에서의 외국변호사 커리어를 '대안적 법률 커리어(alternative legal career)'로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서 기인하지 않나 싶다.

예를 들면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사람이라면 캘리포니아주에서 프랙티스하는 것이 그에게는 정통 커리어 코스이다. 캘리포니아주 변호사가 국내 로펌에서 근무하면서 한국변호사들과 같이 일하며 한국법을 기반으로 한 업무를 한다면 그는 더이상 캘리포니아주 변호사로 일하는 게 아니다. 또한 캘리포니아주 변호사는 한국에서 한국변호사 자격이 없으므로 당연히 한국변호사의 역할도 할 수 없다. 이렇게 국내 로펌에서 일하는 외국변호사는 캘리포니아주에서든 한국에서든 정통 변호사 커리어를 밟는 게 아니므로 일종의 법률 관련 직역에 속하는 대안적 법률 커리어를 밟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직역 내에서 국내 로펌 소속 외국변호사의 업무는 협업과 분업을 통해 한국변호사들을 지원하며 각종 국제법무를 처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내 로펌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외국변호사들이 의견서나 계약서, 판결문 등 각종 법률번역(legal translation)을 많이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번역이 업무의 대부분이 되어 다른 법률업무 능력(legal skill)을 발전시키지 못해 외국변호사가 욕구불만이 생기는 것은 분명히 장기적인 커리어 관점에서 문제이다.

그러나 번역을 많이 한다는 것 자체는 대안적 법률 커리어를 수행하는 외국변호사 직무의 한 특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국내 로펌에서 한국변호사를 지원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외국변호사는 법률번역 업무를 많이 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법률번역 기술을 연마하여 단순번역 업무에서 벗어난 고급번역 영역으로 이를 승화하고, 법률번역 노하우를 다른 업무 영역에도 발전적으로 접목시키면 외국변호사가 번역업무로 느끼는 욕구불만은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다.

필자도 국내 로펌에서 일하면서 어소 변호사 시절 법률번역이 업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컸다.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한국법 의견서의 영문화 업무 외에, 외국기업들이 국내에서 분쟁이 생기면 각종 법원 결정문, 판결문을 영문번역하기도 했고, 국내기업들이 외국기업들과 체결한 수십장짜리 중요한 영문계약을 현업 부서의 업무 참고용으로 국문번역하는 등 국제법무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각종 법률문서를 영문 또는 국문으로 번역했다.

계약서 번역이 가장 어려워

가장 어려운 번역은 역시 실제 거래에서 사용되는 계약서를 번역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외국기업이 자국에서 사용하던 계약서식이나 약관을 국내에서 사용할 경우, 이를 국문번역하는 것은 물론 한국변호사들과 협업하여 계약 규정들이 한국법에 부합하는지 검토 · 수정하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번역을 벗어난 현지화(localization) 업무로서 상당히 고차원적인 법률번역이다. 이런 정교한 법률번역은 한국법 및 국내 계약실무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상당히 고난이도의 고급 (high-end) 업무이다. 외국변호사가 이런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면 그의 업무는 소모적인 단순번역을 초월한 상당히 정교한 국제법무의 성격을 갖게 된다.

외국변호사가 한국법을 알아야 일을 잘할 수 있다

국문 법률번역으로 이런 정도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외국변호사는 한국법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한국어 실력을 갖춰야 한다. 필자는 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로스쿨에서 JD 학위를 취득한 후 국내 로펌에서 외국변호사로 일하기 전 한국법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외국변호사로 일하던 초창기에 한국 법률용어와 표현이 생소해 업무적인 능력에 한계를 느꼈다. 그 후 방송통신대 법학과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고려대 법무대학원에도 진학해 금융법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법을 차근차근 공부하면서 한국법을 기반으로 한 업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동료 한국변호사들과의 협업과 분업이 더 원활해졌다. 또한 처리할 수 있는 업무의 폭도 넓어지면서 사무실에서 더 중용되기 시작했다.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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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국문 법률번역 업무는 사실 외국변호사의 핵심 업무는 아니고 오히려 한국변호사들이 처리하기에 자연스러운 업무이지만, 한국어와 한국법에 충분히 능통한 외국변호사라면 한국변호사들과 함께 팀을 이뤄 처리할 만한 업무이기도 하다.

법률번역은 외국변호사가 갖춰야 하는 기술이다

물론 외국변호사의 핵심 업무로는 역시 영문 법률번역을 포함한 영문 법률업무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영문 법률번역 역시 일정한 수준의 한국어와 한국법 실력이 있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한국어 원문의 법률용어와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영문번역 시 오역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후배 외국변호사들에게 대학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기학습을 통해서라도 틈틈이 한국법을 공부하길 권한다. 또한 법률번역을 단순히 비전이 없는 소모적인 업무로 치부하지 말고 외국변호사 직업의 특성상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계속 발전시켜야 하는, 그리고 다른 업무 영역에도 접목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술(craft)로 인식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예를 들면 치밀한 번역기술을 지닌 외국변호사는 국제계약을 협상할 때 국문 및 영문 법률용어를 번갈아 가며 유창하게 구사하면서 협상을 주도하는 업무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법률번역 업무를 전향적인 자세로 대하면 의외로 다른 영역에서 결실이 생길 수도 있다. 필자는 법률번역 기술을 오랫동안 연마해오면서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우리나라편 영문판(Korea Unmasked)을 포함한 여덟 권의 책을 번역해 출간하기도 했다. 여덟 권 중에 네 권은 국문으로, 네 권은 영문으로 번역하면서 국 · 영문 법률번역 업무를 통해 갈고 닦은 이중언어 실력을 발휘했다. 법률번역 업무를 통해 단순한 '번역사'가 아닌 '번역가'가 된 셈이다.

외국변호사 커리어를 '대안적 법률 커리어'로 이해하고 접근한다면 외국변호사에게 법률번역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번역업무가 왜 그렇게 많은지 이해하기 더 쉽다. 물론 국내 로펌에서 활동하는 외국변호사가 단순히 번역사 역할만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역할만 하는 외국변호사는 커리어에 대한 보람을 찾지 못하고 욕구불만을 느낄 수밖에 없다. 국내 로펌에서 활동하는 외국변호사가 지향해야 할 길은 부단한 노력을 통해 정교한 법률번역 기술(craft)을 보유한 국제법무 전문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법률번역은 외국변호사들이 한국변호사들과의 협업과 분업을 통해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수적인 기술이지만 법률번역이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은정 외국변호사(법무법인 김장리, jun@kimchanglee.com)

◇은정 외국변호사는 누구=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변호사 중 한 명인 은정 외국변호사는 USC 로스쿨(JD)을 나와 1996년 캘리포니아주 변호사가 되었다. 1998년부터 김장리에서 외국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민 · 국적 업무에 탁월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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