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2. 2.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원자력발전 및 천연가스발전을 2023. 1.부터 EU-택소노미(Taxonomy, 녹색경제활동 분류 체계)에 포함시키는 최종안을 확정하였다. 엄격한 조건하에서라면 원자력이나 천연가스도 석탄 · 석유사회를 탄소중립사회(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실질적 탄소배출량을 0으로 만든 사회)로 전환하는 데에 '과도기적 에너지'로서 도움이 된다는 견해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원전이 과연 녹색경제활동인지를 두고는 여전히 논쟁이 뜨겁다. EU-택소노미는 신규 원전 건설이 녹색경제활동으로 분류되기 위해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확보, 저위험 핵연료 상용화 등의 세부조건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실제로는 근시일내 달성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조건들이어서, 원전을 사실상 녹색경제활동에서 제외한 것과 다름없다며 원전업계가 도리어 반발하는 상황도 펼쳐졌다.
K-택소노미는 원전 제외
반면 2021. 12. 환경부에 의해 처음 발표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 가이드라인(K-택소노미)"은 EU-택소노미와 달리 원자력발전을 녹색경제활동의 범주에서 아예 제외하였고, 천연가스(LNG)발전은 한시적으로만 포함시켰다. 일각에서는 K-택소노미가 EU-택소노미와의 통일성을 포기한 것이 아쉽다고 보면서, 차세대 원전기술 투자에 장벽이 되지 않도록 환경부에 개정을 촉구하는 모양새다.
EU-택소노미나 K-택소노미가 무엇이길래 열띤 관심과 논쟁의 대상이 될까? 법률적으로 본다면 택소노미는 강제성이 없는 일종의 권고 가이드라인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택소노미 발표에 관련 업계가 울고 웃는 것은, 이미 택소노미가 연성규범(soft law)의 하나로서 녹색금융 시장참여자들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실질적 규범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택소노미는 일단 마련되면 정부의 정책 설정이나 세금 지원, 금융 혜택 제공, 녹색기금의 대규모 투자 결정 등 다양한 측면에서 널리 활용되고, 그 결과 특정 산업의 투자 조달 용이성, 나아가 향후의 전망에 대해서까지 영향력을 미친다. 이로 인해 택소노미는 별도의 위반 제재수단이 없음에도 개별 법령 못지않은 중요한 행위기준으로서 작용하게 된다.
세계적 추세도 그러하지만, 국내 녹색채권(Green Bond)시장도 그 역사가 짧은 것에 비해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규모 확대되는 녹색채권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국내 상장 사회책임투자(SRI, Socially Responsible Investment) 채권 중 녹색채권은 상장 잔액이 2018. 말 6,000억원에 불과하다가 2020. 말 3조 300억원, 2021. 말 14조 8,090억원, 2022. 2. 20. 기준 16조 1,050억원(발행기관 수 68, 종목 수 157)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국내 녹색채권시장은 정부 및 공공기관 위주에서 점차 민간 금융회사 중심의 시장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투자자 수요도 매우 탄탄하여 '없어서 못 산다'는 말까지 나오지만, 녹색채권이 단순히 수익률이 높아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녹색채권은 최근의 높은 수요를 반영하여 금리가 낮은 경우가 많고, 인증이나 등급 부여에 추가비용도 발생하므로 대개 명목 수익률은 그리 높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투자자들의 높은 관심과 선호에 의한 펀드 수의 지속적인 증가, 정책적 방침에 따른 포트폴리오 편입 증대 등이 시장 확대의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실제로는 조달자금이 쓰이는 사업의 환경개선 효과가 없거나 미미하지만 녹색채권의 분류만 얻어 편익을 노리는 이른바 그린워싱(Green Washing)의 문제도 제기된다.
녹색채권시장은 단기적 · 금전적 수익의 추구라는 기존의 틀에서 얼마간 벗어나, 시장참여자들이 한층 더 복잡하고 장기적인 동상이몽을 꾸는 시장 중 하나일 것이다. 기후위기에 대한 개인적 관심으로 녹색채권 투자를 선호하는 소액투자자, 기업의 친환경 이미지를 널리 알리면서 이른바 '그린뉴딜'의 유행에 올라타는 것이 장기적인 기업가치 향상을 보장할 것이라 믿는 발행회사의 경영진과 대주주, 투자금의 친환경적 사용에 대한 공적 · 사회적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기관투자자나 연기금, 국제기구나 정부 부처의 정책적 요청을 수용하고 이를 가시적인 성과로서 구현하고자 하는 공공기관이나 민간 금융회사까지, 모두 각자의 입장과 목적을 가지고 녹색채권시장에 적극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K-택소노미와 녹색채권 가이드라인
2020. 12. 환경부, 금융위원회, 한국환경산업기술원 및 한국거래소가 공동으로 발표한 녹색채권 가이드라인(Green Bond Guidelines. GBG)은 K-택소노미와 마찬가지로 법적인 구속력은 없지만 국내 녹색채권시장에서 중요한 지침으로 활용되고 있다. K-택소노미가 '어떤 활동을 녹색경제활동이라 평가하고 분류할 것인지, 반대로 무엇은 제외할 것인지'를 다룬다면, 녹색채권 가이드라인은 '녹색채권의 유효한 성립을 위해 조달자금의 사용, 녹색프로젝트의 평가와 선정, 조달자금의 관리 및 사후보고라는 4가지 측면에서 어떠한 사항들이 준수되어야 하는지'를 주로 규정한다.
녹색채권의 과제
K-택소노미와 녹색채권 가이드라인은 어떻게 함께 활용될 수 있는가? K-택소노미는 프로젝트, 자산 또는 기업을 단위로 볼 때 녹색채권을 통해 조달된 자금이 '얼마나 실제로 녹색경제활동에 투입되었는지'를 정량적으로 평가하는데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 가령 금융기관이 어떤 녹색채권 포트폴리오의 녹색투자 성과를 평가하고자 한다면, 해당 녹색채권을 발행한 투자대상기업의 매출액 중 K-택소노미 기준을 충족하는 매출액의 비중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녹색채권의 발행회사는 가이드라인에 따라 발행 전후로 외부기관의 객관적 검토를 받아야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충실하게 이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부 부정적인 견해도 있다. 인증기관들마다 인증이나 등급 부여에 활용하는 기준과 방법론이 서로 다르고, 이에 따라 인증과 등급의 객관성이나 일관성이 보장되기 어렵다는 점은 국내외를 불문하는 녹색채권의 과제이다. 특히 국내의 경우, 실제로는 3개 대형 신용평가회사로부터 최상위 평가등급이 부여된 녹색채권만이 발행 · 유통되고 있어 그 등급에 변별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특정 회사의 일반 회사채 투자적격등급이 그다지 높지 않음에도, 해당 회사가 발행한 녹색채권에는 최상위 평가등급이 부여되어 유통되는 현상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녹색채권에 대한 인증과 등급의 부여, 사후보고의 평가와 검증 측면에서 보다 변별력을 갖춘 제도가 마련되는 것은 녹색금융시장이 더욱 발전하는 데 중요한 선결조건이라고 생각된다.
유정민 변호사(법무법인 지평, jmyu@jipyo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