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4년간 여러 전기설비공사현장과 반도체사업장에서 전기공으로 일하다가 재생불량성 빈혈이 발병한 근로자에게 업무상 재해가 인정됐다. 이 기간 중 회사의 반도체 공장에서 근로자로 일한 기간은 2년 6개월 정도에 불과하나 법원은 이 기간 동안 반도체 공정에서 사용 또는 발생하는 벤젠, 비소, 포름알데히드와 같은 각종 유해 화학물질에 노출되어 업무와 상병 발병 사이에 업무관련성이 인정되고, 전기공으로 일하면서 극저주파 자기장에 장기간 노출된 것이 상병 발병에 유해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서울행정법원 이새롬 판사는 11월 29일 재생불량성빈혈이 발병한 전기공 A(발병 당시 48세)씨가 "업무산 재해를 인정하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2019구단70967)에서 "요양불승인처분을 취소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A씨는 1996년경부터 2010년경까지 다수의 공사현장에서 일용직 전기공으로 일하면서 전기설비공사를 담당했으며, 1996년 2월경부터 1999년 6월경까지 총 2년 6개월 동안은 한 회사의 반도체 공장에서, 2007년 2월 9일부터 16일까지는 또 다른 회사의 반도체 공장에서 전기공으로 전기설비공사를 수행했다. A씨는 2011년 1월 6일 골수검사 결과 특발성 무형성 빈혈(재생불량성 빈혈) 진단을 받자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으나 거부되자 소송(2019구단70967)을 냈다. 이 사건 상병인 재생불량성 빈혈이란 골수 손상으로 조혈 기능에 장애가 생겨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이 모두 감소하는 희귀 질병이다.
이 판사는 "원고가 전기공으로 근무하는 동안 지속적으로 노출된 극저주파 자기장과 반도체 공장에서 전기공으로 일하면서 노출된 벤젠, 포름알데히드, 비소 등의 유해 화학물질이 원고의 체질 등 다른 요인과 함께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재생불량성 빈혈을 발병케 하였거나 적어도 그 발병을 촉진 내지 자연경과 이상으로 악화시킨 원인이 되었다고 추단할 수 있다"며 "따라서 원고의 업무와 상병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함이 상당함에도 이와 다른 전제에서 이루어진 피고의 요양불승인처분은 위법하다"고 밝혔다.
이 판사는 "원고가 담당한 전기설비공사에는 활선상태에서 케이블을 교체, 연결하거나 배전 작업을 하는 업무가 포함되는데, 이러한 배전작업자의 극저주파 자기장에의 노출수치는 산술평균 1.3μT로 이는 사무직 회사원(산술평균 0.05μT)의 26배, 반도체 가공 · 조립공정 종사자(산술평균 0.73μT)의 약 1.78배, 변전소 근무자(산술평균 0.43μT)의 약 3 배에 이르는 높은 수준인 것으로 연구된 바 있고, 위 노출수준(산술평균 1.3μT)은 유럽 환경의학학술원의 2016년 극저주파 자기장의 노출권고하한(산술평균 0.1μT)의 13배에 달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위와 같이 원고가 상당한 농도의 극저주파 자기장에 장기간 노출되었고 원고와 같이 활선작업을 하는 전기공이 타 직군보다 월등하게 그 노출수준이 높은 점, 극저주파 자기장에의 노출이 높을수록 조혈기계통의 암인 골수성 백혈병의 발병율이 높아진다는 다수의 연구결과가 보고된 점, 재생불량성 빈혈도 골수 손상으로 인하여 조혈 기능에 장애가 발생하는 질병으로 골수성 백혈병과 그 발생기전이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원고가 전기공으로 일하면서 극저주파 자기장에 장기간 노출된 것이 상병 발병에 유해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결코 배제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 판사는 또 "원고는 1996. 2.경부터 1999. 6.경까지 총 2년 6개월 동안 한 회사 반도체 공장에서, 2007. 2. 9.부터 2007. 2. 16.까지 또 다른 회사 반도체 공장에서 각 전기공으로 전기설비공사를 수행하였고, 당시 가동 중인 클린룸 내부에도 출입하여 활선 상태에서 케이블을 포설하고 장비와 분전반을 연결하는 등의 작업을 하였다"고 지적하고, "원고가 위 반도체 공장에서의 근무기간 동안 반도체 공정에서 사용 또는 발생하는 벤젠, 비소, 포름알데히드와 같은 각종 유해 화학물질이나 극저주파 전자기장에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노출되었을 것으로 보이고, 반도체사업장에서 측정된 유해물질의 농도가 작업환경 노출 허용기준 미만이었다고 하더라도 작업을 할 당시의 상황에 따라 순간적으로 높은 농도의 화학물질이 발생하여 원고가 이에 노출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 판사는 특히 "원고는 2011. 1. 6. 상병 진단을 받았으나, 2006년 건강검진에서 빈혈 소견이 있었고, 2007년에는 호흡곤란, 어지럼증으로 내원하여 범혈구감소증(재생불량성 빈혈은 범혈구감소증으로 골수세포 충실도가 저하되는 질병을 말한다) 진단을 받기도 하였다"며 "그렇다면 원고가 처음으로 골수검사 등 정밀진단을 받은 것이 2011년인 것일 뿐 원고의 상병 증상이 적어도 2006년경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단할 수 있어(원고는 2006년 전부터 호흡곤란 등 이상증세를 계속 느껴왔다고 진술하고 있다), 따라서 위 1999. 6.경까지의 A 주식회사 B 반도체 공장에서의 업무와 상병 발병 사이에 관련성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고, 앞서 본 바와 같이 원고는 2010년경까지 각종 공사현장에서 전기공으로 활발하게 일한 사실이 인정되므로 이러한 근무 이력은 상병의 진단시기와도 겹치는 것으로 업무 관련성을 추단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원고가 전기공으로 근무하다가 상병을 진단받은 시기는 아직 전자파나 화학물질의 유해성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고 전기설비공사의 작업환경이나 반도체 생산공정의 위험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부족하여 작업환경이 열악한 시기였고,법원 감정의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여러 유해물질에 복합적으로 노출될 경우 유해요소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질병 발생위험도가 높아질 개연성이 있어 극저주파 자기장, 벤젠, 포름알데히드, 비소 등에 만성적으로 낮은 정도로 노출되더라도 복합적, 누적적인 노출의 영향으로 상병이 발병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