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타임즈 법조열전] 폴리매스형 법학자 玄民 유진오
[리걸타임즈 법조열전] 폴리매스형 법학자 玄民 유진오
  • 기사출고 2021.08.1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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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학자로, 소설가로, 관료로, 정치가로
순리에 따르는 격조 있는 삶의 자세 유명

8월호부터 법학계, 법조계의 큰 인물을 소개하는 법조열전을 시작합니다. 행정법학자이자 법사(法史)에 조예가 깊은 김용섭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국내외 법학자와 법률가를 현대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는 인물 탐방, 역사 탐방 시리즈입니다.

현민(玄民) 유진오(1906-1987) 박사(이하 '玄民'이라 함)는 기계 유씨로 부 유치형과 모 밀양 박씨 사이의 10남매 중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玄民의 부친은 경기도 광주 출신이고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유학 후 법부 법률기초위원과 보성전문학교 헌법학 강사로 활동하였고, 헌법 교과서를 한국인 최초로 발간하기도 하는 등 玄民의 학자적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괴테가 되리라"

玄民은 일제 강점기 한국인 최초의 공법학자였다. 玄民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예과 수석으로 입학하였고, 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음에도 일본 고등문관시험을 치르지 않고 소설과 문학, 경제, 역사, 철학에 심취하였다. 玄民은 문예월간 1932년 3월호의 '괴테와 나' 라는 글에서 당시 법학을 전공하게 된 것은 "특별한 이유라기 보다는 나는 아무 반성 없이 조선의 괴테가 되리라는 뜻을 세워 대학의 법과를 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괴테는 법학을 전공한 변호사 출신이면서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을 지내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 등의 소설을 쓴 대문호이면서 폴리매스로 분류된다.

玄民은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한 후 형법 연구실과 법리학 연구실의 조수를 하였고,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인촌(仁村) 김성수의 간곡한 초빙에 의하여 보성전문학교의 전임강사로 채용되어 헌법, 행정법, 국제법을 강의하는 법학자의 삶을 밟아 가게 된다.

玄民은 제헌헌법을 기초하는데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고려대 총장을 마친 후 정계에 진출하여 통합 야당인 신민당의 총재를 맡았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기도 하였다. 3선개헌의 저지를 위하여 투혼을 불사르다 건강이 악화되어 병마로 정치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말년에 국정자문위원회에 이름을 올려 국가원로로서 미약한 역할을 하다가 1987년 8월 30일 8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폴리매스와 군자불기

玄民은 한국사의 굴곡 속에 영욕과 파란만장의 삶을 살다간 폴리매스형 법학자로 평가된다.

와카스 아메드가 쓴 폴리매스(Polymath)라는 책에 보면, 폴리매스란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3가지 이상의 영역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며 종합적 사고와 방법론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도 힘든데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폴리매스는 공자가 말한 군자불기(君子不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군자는 특정한 용도로만 쓰이는 그릇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오히려 군자는 한 분야에만 식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고려대 총장 시절의 玄民(사진 제공=고려대)
◇고려대 총장 시절의 玄民(사진 제공=고려대)

그동안 우리 사회는 한 분야만 깊게 천착한 전문가를 지향하고,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인하여 다방면의 통합적 성찰을 할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이 제대로 행하여지지 못했다. 폴리매스의 특징은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 탁월한 지능, 놀라운 창의성 등을 들 수 있다. 폴리매스형 법학자인 玄民은 법학자의 본령을 지키면서 소설가, 행정관료, 교육행정가, 정치가 등 각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으며, 놀랄만한 성취를 이루었다.

유일한 헌법학 교수, 玄民

첫째, 玄民은 헌법학자로 제헌헌법에 관여하게 된다. 제헌 헌법이 논의되는 시점에서, 제헌헌법을 제정해야 하는 국가적 과제 앞에서 제헌헌법의 설계자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유일한 헌법학 교수인 玄民의 이름이 계속 거명되었다. 玄民이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일본고등문관시험 출신의 행정관인 윤길중, 황동준 등의 조력을 받았고, 玄民이 기초한 유진오안과 권승렬안이 상정되어 국회 심의과정에서 상당 부분 수정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玄民의 제헌헌법 전문위원 활동을 과소평가할 것도 아니고(weder), 제헌헌법의 초안 작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을 들어 '헌법의 아버지'로 玄民을 과도하게 치켜세울 일도 아니다(noch). 玄民이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 전문위원으로서 그의 명민한 문학적 재능과 헌법적 역량에 기초하여 제헌헌법의 제정과정에 상당히 비중 있는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

아울러 玄民은 <헌법해의>, <헌법기초회고록> 등의 저서를 남겼다. 1954년부터 1987년까지 학술원 종신회원으로 있었다. 1957년부터 1961년까지 헌법학자와 행정법학자의 학술적 모임인 한국공법학회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으나 활동은 미미하였다. 玄民은 대학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과정을 밟지 않았고, 1955년 4월에 연희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둘째, 玄民은 경성제국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후 보성전문학교에 소속된 법학자이면서 소설가의 길을 병행하였다. 당시에 일본 유학을 하지 않은 '현해탄 콜픔렉스'를 소설가로 활동하는 등 다방면의 역량을 통하여 극복하였다고 평가된다. 현민은 신동으로 어린 시절부터 한문을 통달하고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 아울러 玄民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에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며 등단을 한 후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해방 전에 창랑정기, 김강사와 T교수, 화상보 등 30여편의 소설을 발표한 玄民은 이효석과 더불어 동반자작가의 한 사람으로 필명을 날렸다. 이러한 문학활동은 해방 전까지 법학교수의 활동과 병행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문학활동이 1939년 이후 이광수 등과 함께 조선문인협회를 결성하면서 친일파로 분류되는 빌미를 만들어 주기도 하였다. 다만, 문학활동을 통한 필력은 그의 학자적 삶과 대외적 활동의 역량을 발휘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문학적 활동이 반영되어 玄民은 1966년 5월 경희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초대 법제처장 역임

셋째, 玄民이 관료로서 활동한 것을 들 수 있다. 정부수립 후 정부조직법을 만드는 단계에서 초대 법제처장으로 내정된 것을 알게 된 후에는 법제처의 조직을 크게 키우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스스로 절제하는 품성을 보여주었다. 玄民은 초대 법제처장으로 근무하면서 대한민국 법제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고등고시 사법과 제1회 합격자인 목촌(牧村) 김도창 박사를 발탁하여 법제처에서 근무하도록 하여 훗날 목촌 역시 법제처장과 한국공법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1984년 한국행정판례연구회를 발족하는 등 한국 행정법학의 초석을 놓는 데 기여하도록 하였다.

玄民은 법제처장을 그만둔 후 1953년 대한국제법학회의 초대 회장을 맡아 1968년까지 15년간 학회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玄民은 한일 외교관계의 초창기에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를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아울러 국가적으로 외교관이 제대로 양성되지 못한 시기에 한일회담 대한민국 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약 10여년간 정부를 대표하여 외교적 업무를 추진하였다.

넷째, 玄民은 교육자 내지 교육행정가로서 활동했다. 고려대 총장으로 취임한 후 미국 하버드대의 옌칭연구소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선진국의 문물을 익혔다. 이와 같은 오랜 기간의 고려대와의 인연의 배후에는 仁村 선생과의 깊은 인간적 존경과 신뢰가 자리 잡고 있다. 玄民은 1932년부터 1966년까지 34년간 고려대에서 봉직하였으며, 강사, 전임강사 그리고 교수와 법학과장, 법과대학장, 대학원장을 거쳐 제2대부터 제5대까지 3번 연임하며 14년간 고려대 총장으로 활동하고, 고려대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당시 유능한 교원을 채용하여 학교의 위상을 크게 높였으며, 인재를 길러낸 과정을 양호기(養虎記)에 적고있다.

玄民 정계 진출에 YS 적극 찬성

다섯째, 玄民은 법제처장, 대학총장 등의 경험과 경륜을 토대로 정계에 진출하여 대통령 후보로 나와 경합하다가 윤보선 후보에게 양보하며 야권 단일화를 이루어 낸 절제와 균형의 정치인으로 평가될 수 있다. 정치 1번지이자 자신이 태어난 곳인 종로구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하였다. 玄民이 정계로 진출하는 과정에 김영삼이 원내대표로 적극 찬성하였고 막역한 사이였다. 玄民이 신민당 총재 시절 김대중이 대변인을 맡게 되어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YS와 DJ가 당 총재인 玄民으로부터 바람직한 정치가 무엇인지 제대로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고 보인다.

이상과 같이 玄民이 다양한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 것은 부친의 영향도 없지 않았지만 그의 비범한 능력과 논어 등 고전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성실한 삶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玄民의 사후 우리 사회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상반되고 있다. 일각에서 친일 행적과 말년에 국정자문위원회에 참여한 것을 문제 삼는다. 그와 같은 도덕적 평가는 한 인간 전체에 대한 평가이므로 그 비난으로부터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러나 역할분리의 관점에서 玄民이 수행한 공적 중 문학 활동에서 비롯되는 친일적 행적이 있으나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적극적 친일을 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해방 후 국가사회에 크게 기여한 점을 볼 때 부분의 흠을 가지고 전체적인 공적을 폄하하기보다는 그가 수행한 역할과 역량을 어떤 지위에서 수행하였는지를 검토하여 각각의 관점에서 달리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폴리매스는 다양한 분야에 탁월한 재능이 있어 이념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고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하여 자신이 관심을 두는 분야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기도 한다. 출중한 역량이 있는 자원을 정파를 초월하여 활용하는 것은 국가를 위해 필요한 것이지 이를 매도할 것은 아니다. 다양한 기능과 역할 속에서 수행한 공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공과 과를 비교하여 공이 많은 인물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점에서 玄民이 좌우를 넘어 자신의 역량을 펼친 부분 중 일부를 떼어내어 이를 지나치게 부풀려 그동안의 공적을 폄하할 것이 아니다.

탁월한 엘리트, 중용지덕 겸비

玄民은 권력을 좇는 삶을 산 것이 아니라 역량 있는 그에게 기회가 다가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玄民은 탁월한 역량의 엘리트임에도 중용지덕(中庸之德)을 겸비, 무리하지 않고 순리에 따르는 격조 있는 삶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시대의 도래에 따라 AI와 경쟁하게 되는 법률가상의 모색을 위해, 한 분야만을 좁게 파고드는 편협한 시야에서 벗어나, 넓은 영역을 조감하면서 융합적 통찰력을 갖춘 폴리매스형 법학자인 玄民의 삶과 활동을 재조명 할 필요가 있다.

김용섭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kasan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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