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 교육, 고기 잡는 방법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쳐야"
"로스쿨 교육, 고기 잡는 방법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쳐야"
  • 기사출고 2021.07.1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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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호 교수, "로스쿨 실패 원인은 판례 암기 변시 때문"
7월 7일 서울대 로스쿨에서 진행된 '기초법학 진흥을 위한 토론회'에서 "법사(法史)를 잊은 법학도에게 미래는 없다"는 주제로 발표한 서울시립대 로스쿨의 정병호 교수는 로스쿨 교육이 법학전문대학원 설치 · 운영에 관한 법률 제2조가 천명한대로 "풍부한 교양, 인간 및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유 · 평등 · 정의를 지향하는 가치관을 바탕으로 건전한 직업윤리관과 복잡다기한 법적 분쟁을 전문적 ·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식 및 능력을 갖춘 법조인의 양성"이라는 교육이념을 실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대단히 회의적이라고 진단하고, 여러 원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판례를 알고 있는지를 묻는 문제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변호사시험 출제 경향 때문이라고 갈파했다.
 
◇7월 7일 서울대 로스쿨에서 '기초법학 진흥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주제발표와 토론 등을 맡은 참가자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7월 7일 서울대 로스쿨에서 '기초법학 진흥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주제발표와 토론 등을 맡은 참가자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정 교수는 "선택형도 나름의 장점이 없지 않지만, 무엇이 정당하고 부당한지, 무엇이 합법이고 불법인지를 부단히 질문해야 하는 법학에는 적합하지 않다"며 "판례 암기로는 날로 새로 발생하는 '복잡다기한 법적 분쟁'을 해결할 능력을 함양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더구나 인공지능이 현실화되고 있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판례 암기와 같은 학습방식으로는 특이점 도달 전의 인공지능과도 경쟁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가 독일의 한 사례를 소개했다. 

괴팅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학생이 국가시험(Staatsexamen: 우리의 변호사자격시험에 해당)의 한 과목에서 평소 준비한대로 수험서의 모범답안과 판례에 따라 문제를 풀었는데, '충분한 ausreichend(4점)'이라는 성적을 받아 합격총점에 0.5점이 부족한 20.5점을 얻어 불합격 되자, 이의를 제기하였다. 재고절차(Überdenkungsverfahren)에서 출제자들은 해당 과목 점수를 5점으로 상향했다. 그러나 제1검토위원은 주정부의 사법시험 주관청에 "그의 답안 중 상당부분이 수험서의 모범답안과 거기서 다룬 판례와 동일하다"는 지적을 했고, 시험주관청은 그 수험생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결론을 내리고, 0점 처리를 하였다. 그 수험생은 행정소송을 제기하여, 전문의의 조언에 따라 심리적 안정을 얻기 위해 모범답안을 암기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우연히 그 시험에서 이 모법담안을 기억해냈고 그 문제에 적용했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부정행위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0점 처리한 결정은 잘못이라고 판단했다. 동시에 시험주관청에 대해 시험을 다시 채점하고, 채점시 특히 답안의 독자성 측면을 고려하라고 명령했다. 재채점 결과 3점('하자 있는 mangelhaft')이 부여되었다. 제소한 결과 애초의 성적보다 1점 더 손해 본 셈이다. 그 수험생은 불이익변경금지 원칙 위반이라는 이유로 다시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은 재채점이 다른 기준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점수하향도 허용된다고 판단했다. 그 수험생이 자신의 논증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채점위원들의 지적은 타당하다고 하였다. 단순히 문장을 외워서 쓰는 것은 독자적인 답안이라 할 수 없으며, 수험생은 서로 다른 견해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를 취하는 것이 기대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우리의 현 시험과 교육이 '국민의 다양한 기대와 요청에 부응하는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인지 되돌아보게 된다"며 "로스쿨 교육에서는 리걸 마인드 형성을 위해 실정법 해석과 관련한 다양한 학설을 비판적 검토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법학도들이 로스쿨에서 법이론을 제대로 교육받아 판례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능력을 함양하지 못한다면, 그들한테 장래 변호사로서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법리적 관점에서 타당성이 결여된 판례를 변경시킬 적극적 역할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며 "판례를 포함한 현재의 법 상태를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실정법의 도그마틱 뿐만 아니라, 법철학적, 법사적, 법사회학적 소양을 갖추어야 함은 물론이다"고 주문했다.

◇7월 7일 서울대 로스쿨에서 진행된 '기초법학 진흥을 위한 토론회'에서 서울시립대 로스쿨의 정병호 교수가
◇7월 7일 서울대 로스쿨에서 진행된 '기초법학 진흥을 위한 토론회'에서 서울시립대 로스쿨의 정병호 교수가 "법사를 잊은 법학도에게 미래는 없다"는 주제로 발표하고 있다.

정 교수는 "로스쿨 교육은 실정법이라는 드넓은 호수의 모든 고기를 잡아주려고 시도하기 보다는 고기 잡는 방법만이라도 제대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며 "그래야 리걸 마인드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가 이날 발표에서 추천한 고기잡는 방법의 하나는 '로마법과의 대화'. 그는 "로마법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문명국가 사법(私法)의 뿌리여서 로마법에 대한 이해가 현행 사법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로마법이 현행법과의 비교대상으로서도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현재의 난해한 법률문제 해결을 위해 직 · 간접적으로 로마법의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며 학설 · 판례상 논의되는 구체적 법률문제 해결에 로마법이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례 몇 가지를 소개했다.

'제4차산업혁명 시대 인공지능의 민사책임'도 그중 하나로, 인공지능이 계약을 체결하거나 불법행위를 저지를 경우 발생하는 법률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즉, 인공지능의 법인격, 행위능력, 불법행위능력 등이 문제되는데, 정 교수는 "인공지능과 관련한 사법상 문제에 대해서는 로마에서 노예를 경제활동에 투입하여 생긴 법률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가 참고가 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로마법상 노예는 물건으로서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었다. 하지만 노예를 효과적으로 영업활동에 투입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노예에게 특유재산을 인정하였다. 법적으로는 이것도 주인의 소유였지만, 노예해방의 경우 노예에게 증여 또는 유증되는 경우가 잦았으므로, 사실상 노예의 재산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기타 재산에 대한 불요식의 처분에는 주인의 동의나 추인이 필요했으나, 특유재산의 처분에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법인격이 없는 노예는 거래를 통해 스스로 법상 채무를 부담할 수 없었으나, 일정한 요건을 갖춘 경우 노예의 거래행위는 상대방에게 주인에 대한 법무관법상 부가적 소권(특유재산소권actio peculio, 전용물소권actio de in rem verso, 명령소권actio quod iussu, 선주소권actio exercitoria, 지배인소권actio institoria, 분배소권actio tributoria)을 발생시켰다. 특히 특유재산소권은 가부장이 노예(또는 家子)에게 특유재산을 부여했고, 가부장권 복속자가 거래상 타인에게 채무를 부담한 경우, 그 거래가 특유재산에 관한 것인지 불문하고 모든 거래상 채무에 대해 가부장은 특유재산 가액을 한도로 책임을 졌다. 다만 이 책임은 특유재산 자체에 대한 책임이 아니라, 그 가액한도로 가부장의 (시민법상 그 소유인 특유재산을 포함한) 전재산, 즉 책임재산에 미쳤다. 또 가부장이 악의로 특유재산에서 빼낸 재산, 가부장의 특유재산에 대한 채무를 합산했으나, 가부장의 채권은 공제되었다.

정 교수는 "인공지능의 경제활동으로 인한 책임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는, 인공지능에 권리능력을 인정할 필요없이 로마법상 가자(家子)나 노예처럼 특유재산을 인정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으로 고려해 볼만하다고 생각된다"며 "즉 로마의 노예처럼 인공지능 로봇은 특유재산을 소유하지 않지만 특유재산을 관리하거나 처분할 수 있고, 그 거래 상대방은 특유재산의 범위 내에서는 인공지능 로봇과의 거래행위로 인한 채권을 주인을 상대로 행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