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타임즈 칼럼] 중동에 부는 변화의 바람, 위기인가 기회인가
[리걸타임즈 칼럼] 중동에 부는 변화의 바람, 위기인가 기회인가
  • 기사출고 2020.10.12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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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id-19가 촉발한 경제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분야에 충격을 가하고 있지만,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저유가를 매개로 중동 산유국에 특히 큰 타격을 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적 위기는 그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구성원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줄 수밖에 없지만, 철옹성 같던 낡은 정치, 경제, 사회구조와 제도의 벽을 허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배지영 변호사
◇배지영 변호사

그간 중동 산유국들이 독자적인 시간표에 따라 진행해 왔던 탈석유화 프로젝트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이러한 압력에 의해 변형되고 가속화될 전망이다. 우리나라 어느 기업가의 언급처럼, 탈석유화 프로젝트를 추구하는 중동이 21세기 새로운 기회의 땅이 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은 시기상조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중동에 이번에는 경제에서 비롯된 변화의 모래폭풍이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의 결과에 따라 출렁이게 될 이란과 터키의 움직임까지 고려하면 이 폭풍의 규모는 역대급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격변의 시기에 이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적인 지형을 반영하는 중요한 법제도들이 변화해가는 궤적을 추적해보는 것은 적지 않은 의미를 가질 것이다. 전염병이 몰고온 글로벌 경제위기, 그와 가장 먼저 연결될 것으로 예상되는 도산 관련 제도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2009년 금융위기의 기억

흔히 GCC로 통칭되는 페르시아만 산유국들의 도산 관련 법제도는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이는 변제능력이 없는 채무자의 재산을 청산하여 이해관계자들에게 분배하는 절차를 간단히 정리한 수준이었고, 채무자의 사업을 유지하는 것을 전제로 한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대부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입법자들의 무관심 속에서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채무자는 채권자들과 사적인 합의를 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2003년부터 2008년 사이의 고유가 시기에 대규모 재정흑자, 풍부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한 공격적인 투자와 자산가격의 상승을 바탕으로 GCC 국가들의 경제적 규모가 급격히 팽창하였다. 그러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가 하락, 주식과 자산 가치의 폭락으로 유동성 위기를 겪는 기업들이 속출하였지만 GCC 국가들의 법제도는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수쿡(이슬람 채권)의 특수한 구조, 각 국가들에서 유동담보를 인정하는 범위의 모호성 등으로 인해 도산한 프로젝트 자산에 관한 우선권을 누가 가지는지에 대한 사법적인 판단과 관련해서 심각한 혼란이 생기기도 하였다.

임시법 제정해 해결

2009년 12월 UAE 토호국 두바이의 국영기업 두바이월드가 디폴트를 선언하고 다른 기업들의 디폴트 선언이 이어지자, 두바이 정부는 두바이월드와 그 계열사들의 금융채무와 관련한 분쟁을 처리할 임시위원회를 설치하는 칙령을 발표하기에 이른다(Decree No. 57 of 2009). 이 칙령의 내용은 법원이 감독하는 절차를 통해 두바이월드의 채무를 조정하겠다는 것이었으며, 채권자 및 주주 과반의 동의로 구조조정안을 승인하는 구조였다. 쿠웨이트도 2009년 3월 비슷한 취지로 변제능력이 없는 은행 및 기업의 구조조정을 지원하기 위한 임시법(Financial Stability Law)을 제정하였다.

위 급조된 법령들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지만(특히 두바이의 경우 2011년경 두바이월드의 구조조정계획의 이행이 완료되었다), 그 적용대상이 한정되고 잠정적인 효력만을 가진 것이었다. GCC 국가들 사이에서 기존의 도산법령이 경제위기 상황에 대처하기에 부족하다는 자각이 생겼고, 특히 외국 투자자들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확실한 법제도, 특히 도산 위험 속에서 채권자들의 권리가 어떻게 구제될 수 있는지에 대한 보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2012년을 전후로 UAE를 필두로 하여 기업의 구조조정을 포함하는 도산법의 제 · 개정작업에 돌입하게 되었다.

법원을 통한 구조조정 제도의 도입

2016년 UAE가 GCC 국가들 중 최초로 새로운 파산법(Law No. 9 of 2016)을 발표하였고, 2018년에 바레인이 '새로운 구조조정 및 파산에 관한 법률(Law No. 22 of 2018)'을, 사우디아라비아가 새로운 파산법(Royal Decree M 50 of 1439, Resolution No 264 on 1439)을 발표하였다. 새로운 법령들은 낙후된 도산제도 보유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채무자에게 구조조정의 기회를 부여하며, 채권자들을 투명하고 공평하게 대우함으로써 외국투자자들에게 매력적인 투자여건을 어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선두주자인 UAE의 새로운 파산법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재정적 위기에 처한 채무자가 법원을 통해 선택할 수 있는 절차는 크게 3가지이다. 첫째는 예방적 채무조정(preventive composition) 절차로서 채무자가 법원이 승인한 변제계획안을 통해 채권자와 합의를 하는 절차이다. 채무자만이 이 절차를 신청할 수 있으며, 채무자는 채무불이행 상태이기는 하나(30일 이내) 채무초과 상태는 아니어야 한다. 법원이 신청을 승인하면 채무이행을 감독할 관리인을 선임하여 채무자와 함께 변제계획안을 작성하며, 채무자는 관리인의 감독하에 자신의 사업을 계속 운영할 수 있다. 두 번째는 구제(rescue) 절차로서 한국의 법정관리(회생)절차와 유사하다. 채무자뿐만 아니라 채권자와 검찰도 신청할 수 있으며, 법원이 신청을 승인하면 구제절차의 개시사실이 공시된다. 법원이 선임한 관리인이 변제계획안의 작성 및 운영을 관할하고, 채무자는 사업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다. 세 번째는 한국의 파산절차에 해당하는 절차(liquidation)로서, 채무자의 자산을 매각하여 채권자들에게 분배하고 채무자는 청산된다.

사우디, 채무자에 3가지 선택지 제시

바레인의 신법은 채무불이행 또는 부채초과인 채무자가 법원의 감독하에 구조조정안을 작성하여 승인받고 이행해 나갈 수 있는 절차를 도입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UAE와 유사하게 예방적 합의(preventive settlement), 재정적 구조조정(financial reorganization), 청산(liquidation)의 세 가지 선택지를 채무자에게 제시하고 있다.

GCC 국가들이 새로 도입한 도산제도는 위기의 채무자가 채권자들과의 사적인 합의를 시도하는 것 이외의 현대적이고 국제적인 기준에 부합하는 선택지를 제공하고자 한다. 그러나 법제도의 성공을 위해서는 투명하고 포괄적인 시행을 위한 정책적 의지와 법원이 활용할 수 있는 적절한 전문가의 확보가 필수적이라는 것이 시장의 판단이다.

새로운 UAE파산법에 따라 처리된 사건은 아직까지 손에 꼽히는 수준이며, 상당한 규모의 구조조정 사건들은 아직까지 신법의 틀 안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이다. 작년 말 27억 달러의 부채를 누락하여 계상한 것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중동 최대의 헬스케어 그룹 NMC 관련 사건에서도, 채무자와 주채권자인 금융기관들은 UAE 법원을 통한 방식이 아닌 사적인 합의를 도모하고 있는 상황이다. 법은 만들어졌으나 아직 이용자들을 만족시킬 만한 투명하고 일관성 있는 운영력을 갖추기까지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두바이=배지영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 jiyoung.ba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