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몸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그 타인뿐"
"타인의 몸을 만질 수 있는 사람은 그 타인뿐"
  • 기사출고 2019.08.18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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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판사의 "어떤 양형 이유"

울산지법의 박주영 부장판사에 따르면, 판결문은 '법적으로 의미 있는 사실만을 추출해 일정한 법률효과를 부여할 뿐 모든 감상은 배제하는 글'이다. 민사든 형사든 매우 엄정한 형식과 표현으로 판결문을 써야 한다. 그런데 그나마 판사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형사 판결문의 '양형 이유' 부분이다.

박 판사가 최근 건조하고 딱딱한 판결문이라는 형식에 미처 담지 못한 수많은 사람의 눈빛과 사연을 담은 단행본 《어떤 양형 이유》를 펴냈다. 피고인에게 특별히 전할 말이 있거나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고 싶을 때 특히 공들여 썼다는, 박 판사가 실제 판결문에 있던 양형 이유뿐만 아니라 판결문으로는 표현할 수 없어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당사자들의 아픔과 판사의 번민을 담은 현직 판사의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주영 판사의 《어떤 양형 이유》
◇박주영 판사의 《어떤 양형 이유》

박 판사는 가정폭력 사건의 양형 이유에서, "큰 사람이 작은 사람을 학대하고,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가 폭력으로 누군가에게 고통만을 안겨주고 있다면, 그곳에는 더 이상 가정이라 불리며 보호받을 사적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이 난무하는 곳보다 더한 공적 영역은 없다"고 적었다.

4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은 선박건조 현장에서의 산업재해 사건에선, '저녁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삶이 있는 저녁'을 걱정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이 다수 존재한다는 현실은 서글프기 그지없다며 기소된 피고인 전부에게 예외 없이 금고형과 징역형을 선택해 무겁게 처벌했다. 박 판사는 빈부나 사회적 지위, 근로조건의 차이가 현저한 여명(餘命)의 격차로 이어지는 사회는 암울하다고 꼬집었다.

박 판사는 자신의 수업을 듣던 여학생 여섯 명을 상대로 여덟 번에 걸쳐 어깨와 팔꿈치 사이 부분을 만지고, 허리를 감싸안거나 옆구리를 움켜쥐는 등 학생들을 강제추행했다는 내용으로 기소된 대학교수에게 강제추행 유죄라며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1년, 성폭력치료프로그램 40시간을 선고했다. 박 판사의 양형 이유는 "타인의 몸을 자유롭게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타인뿐"이라는 것. 피고인이 항소해 벌금 1000만원으로 감형되었지만,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 벌금 1000만원이 그대로 확정됐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그가 운명이라고 하는 사건이 다른 많은 판사에게는 처리 건수 하나짜리에 불과했다'는 문장을 읽는 순간 이 책을 추천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이 문장을 '판사에게는 처리 건수 하나짜리에 불과한 사건이었으나 그에게는 전 운명이 달린 사건이었다'로 바꿔 읽었던 것 같다"고 추천사에서 적었다. 

박주영 판사는 성균관대 법학과를 나와 1996년 제3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며, 7년간 변호사로 일하다 경력법관제도로 판사가 됐다. 지역법관이 아니지만 1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부산지법, 울산지법, 대전지법 등에서 주로 형사재판을 담당했으며, 부산가정법원에서 소년재판을 한 적도 있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