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천은 법학 공부의 자부심"
"유기천은 법학 공부의 자부심"
  • 기사출고 2006.06.19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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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고 교수, 세계적인 형법학자 유 교수 전기 펴내비판적 지성의 평범하지 않았던 삶, 학문 세계 조명
"유기천은 한국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하나의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기천 전기'의 표지
세계적인 형법학자였던 고 유기천 서울대 법대 교수의 제자인 최종고 교수(서울대 법대)는 유 교수가 우리나라와 세계 법학계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비중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동경제대 법학부를 나와 예일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유 교수는 세계 법학계에서 '폴 케이 류(Paul K. Ryu)'라고 하면 모르는 학자가 없을 정도로 학문적 성취가 대단한 인물이다.

특히 학문의 길로 들어서 줄곧 독신으로 지내다 44세때인 1959년 역시 세계적인 형법학자인 헬렌 실빙 박사와 결혼해 함께 형법학의 연구에 정진한 것으로 유명하다.

61년 헬렌 실빙 박사와 함께 우리 형법전을 영어와 독일어로 번역, 출간하는 등 탁월한 능력으로 이미 1950~60년대 세계 법학계에 한국 법학을 상당한 수준으로 심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 교수가 이런 유 교수의 평범하지 않은 삶과 학문적 세계를 집대성해 최근 전기를 펴냈다.

모두 430쪽의 적지않은 분량으로 한들출판사가 출간한 이 책엔 '자유와 정의의 지성, 유기천'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유 교수에 관한 전기로는 처음이다.

그의 젊은 시절부터 26년간의 망명생활을 거쳐 1998년 6월 미 샌디에고에서 작고하기까지 한국 법학 건설에 견인차 역할을 한 대표적인 법학자로서의 생애와 학문 세계가 지인과 제자들의 증언 등을 통대로 풍부한 자료와 함께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마지막 강의후 미 망명 과정 감동적

또 세간에 '쌍권총 총장'이란 희화화된 표현으로 잘못 알려진 전말이 소상하게 설명돼 있으며, 유 교수가 서울대 총장에서 물러난 이후 형법총론 강의 시간에 유신 음모를 비판하다 박정희 정권의 미움을 사 미국으로 망명하기 까지의 과정이 소설처럼 감동적으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1971년 4월12일에 있었던 이 강의는 망명전 유 교수의 마지막 강의가 됐다.

중앙정보부의 추적을 받아 온 유 교수가 중정에 파견나가 있던 제자인 박종연 검사의 귀뜸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애제자중 한 사람으로 당시 판사였던 고 강구진 교수가 변장을 해가며 유 교수에게 필요한 물건을 전달해 주었다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화 등이 증언 등을 통해 소개돼 있다.

유 교수는 '서울의 봄' 때인 1980년 3월 일시 귀국해 서울대 법대에서 "세계 역사상 가장 용감했던 인물은 마르틴 루터…"라고 시작되는 유명한 강의를 하기도 했으나, 5.17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시인 모윤숙씨와의 가까웠던 관계도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대목.

6년 연상이지만 유 교수를 대단히 좋아했다는 이 여류시인은 유 교수에게 여러 도움과 마음의 위로를 제공하며 오랫동안 교유했으며, 유 교수의 호인 '월송(月松)'도 그녀가 지어 주었다고 최 교수는 적고 있다.

"그의 꿈과 좌절은 한국 법학계의 꿈과 좌절"

유 교수는 미국에 있으면서도 국내 상황에 대해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1노3김이 맞붙은 1987년 대선때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촉구하는 편지를 직접 써 보냈으며, 80을 넘은 나이인 1997년엔 서울에 들러 본인이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마지막까지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최후의 십자가를 지려 한 것이라고 최 교수는 회상한다.

서울법대 재학시절인 1967년 법학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해 스승이자 총장이던 유 교수를 찾아가 신학으로 전향할까 한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가 "아직 2학년 학생이 법학을 뭘 안다고 그러느냐"는 불호령을 들었다는 최 교수는 "그의 전기를 쓰는 일은 법학은 물론 한국의 지성계와 정치와도 관련있는 의미있는 일"이라고 집필 동기를 밝히고 있다.

"유기천 만큼 전 세계를 무대로, 그러면서 학문과 정치, 종교의 광범위하고도 심도 있는 삶을 산 분을 보지 못했다"는 최 교수는 "서울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인생의 후반은 우리나라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며 고인이 되어서야 고국땅을 밟을 만큼 결코 순탄하지 못했다.

제자인 서울대 법대 안경환 교수의 표현처럼 그의 삶은 '격동의 한국사에서 이성의 촉수를 곧추세웠던 한 지식인의 행동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 교수는 전기 말미에서 "유 교수의 학자로서의 꿈과 좌절은 한국 법학계 전체의 꿈과 좌절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1950~60년대 보다 훨씬 좋은 교육여건을 갖고 있으면서도 유기천과 같은 국제적 지성의 법학자가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은 그가 말한 대로 '고결한 지력'의 결핍 때문일 것"이라고 한국 법학계의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최 교수는 '어설픈 지식은 오히려 위험하다'는 유 교수의 말을 다시 심각히 상기해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유 교수가 평소 강조했던 다음의 말을 그의 마지막 교훈으로 제시하고 있다.

"법률가는 먼저 그 참된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데에서부터 그의 직업이 시작됩니다. 부스러기 법률지식을 가졌다고 그 사회의 지도력을 가졌다고 자처한다면 가소로운 일입니다."

19일 오후 6시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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