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가는 판사
병원가는 판사
  • 기사출고 2005.10.31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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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용 판사]
누구나 일평생 살아가면서 자주 병원 신세를 지고 싶지 않겠지마는 필자는 단골손님까지는 아니더라도 심심치 않게 병원 신세를 지는 고객이다.

◇유해용 판사
수년 전부터 고혈압으로 약을 복용하고 있는데 의약분업이 시행된 후부터는 매달 또는 두 달에 한 번 꼴로 처방전을 받으러 병원에 가야하니 이만저만 귀찮은 일이 아니다. (이야기가 옆길로 새지만, 필자가 고혈압 증세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한 것은 1995년경 법원에서 정기 건강검진을 받고 나서였는데 그 때 담당의사가 느닷없이 "군대에는 갔다 왔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하였더니 "이 혈압으로 어떻게 군대를 갔느냐, 면제대상이 되고도 남는다"고 하는 바람에 황당하여 혈압이 더욱 올라갔던 적이 있었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소화가 잘 안되고 속이 뒤틀리는 체질이라 내시경에는 이력이 날 정도로 위장 내시경 검사도 여러 번 경험하였다. 한번은 영장전담판사로 일할 때인데 내시경 검사를 마친 직후 곧바로 영장실질심사를 하러 들어갔다가 구강마취가 덜 풀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바람에 서글픈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다.

또 치과하면 이가 갈릴(?) 정도로 치과 신세도 많이 졌다. 부산지역에 근무하는 M선배가 국무총리를 지낸 어느 분의 예를 들면서 원래 잔병치레가 많은 사람이 큰 병이 없어 오래 사는 법이라고 위로해준 적도 있지만, 가히 '종합병동'이라고 불릴 만하다.

판사의 일이란 것이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재판 날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그래도 10년이 넘게 판사생활을 하면서 아직까지 몸이 아파 재판에 큰 지장을 준 적이 없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그런데, 세상 모든 일에 양면이 있다고 병원에 가는 것이 반드시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몸의 이상 징후가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주변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게 한다. 질병이라는 시련에 직면하는 순간 잔잔하고 단조로운 일상사조차도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실감하는 수가 많다. 건강하게 살아있음 자체가 큰 선물임을 깨닫게 한다. 분수도 모르고 욕심을 부리고, 엉뚱한 곳에 힘을 쏟으면서 스스로를 파괴하고, 필요 이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공연히 분함과 미움의 감정을 가졌던 것을 뉘우치게 된다. 또 다행히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확인을 받고 나면 자신감을 가지고 활력 있게 생활할 수 있다.

언젠가 병원 대기실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며 병원이 돌아가는 모습과 우리 법원에서 하는 일을 비교해 본 적이 있다. 병원을 찾는 사람이나 법원을 찾는 사람이나 곤궁하고 절박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의사의 치료가 육체적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면, 재판, 특히 형사재판은 사회적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람들은 흔히 가운을 입고 일을 하는 세 가지 직업(성직자, 의사, 판사)을 함께 놓고 비교하여 말하곤 한다. 이들 직업이 갖는 사회적 책임과 업무의 공익적 성격을 반영한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런 사람들의 부정과 비리, 실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강한 비난의 대상이 된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남의 정신과 영혼을 어루만지는 성직자, 생명을 다루는 의사, 세상의 시시비비를 가리고 남을 심판하는 판사에게 고도의 공익성, 청렴성과 도덕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익적 기대가 어긋났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격한 배반감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이들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보면 물질주의와 이기심이 팽배하고 탁류가 휩쓰는 세상일지라도 누군가는 양심과 정의와 숭고한 인간정신의 수호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대 때문일 것이리라.

병원에서 대기시간이 긴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시간예약을 하고 가더라

도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의사가 놀고 있기 때문에 진료가 지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차피 지키지 못할 약속시간을 정해준 것을 원망하게 된다.

우리 법원에서는 최근에 이른바 '시차제 기일지정'을 통해 재판대기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지루하게 순서를 기다리는 당사자들은 마찬가지의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초조하게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불쑥 차례를 어기고 먼저 진료를 받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면 '누군 시간이 남아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가'라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된다. 변호사가 선임된 사건을 먼저 진행하는 관행에 대한 비판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십분 이해가 간다. 아무리 사소할망정 사람마다 자기 병이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이다. 약식명령이나 소액사건이라고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의사 앞에 서면 왠지 주눅이 든다. 무엇 좀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싶어도 괜히 핀잔이나 들을까봐 주저하게 된다. 정작 나의 문제인데도 돌아가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내 돈 내고 진료 받는데 왜 이렇게 위축될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자기가 낸 세금으로 법원을 짓고 법원공무원에게 봉급도 주는 국민이 재판과정에서 이런 느낌을 갖는다면 어떤 눈으로 법원을 바라보게 될까?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에 있는 환자에게 의사나 간호사의 친절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자체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초조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법정에 온 당사자의 입장에서도 '아버지 같은'포근함을 주는 판사가 고마운 것은 별반 다를 것이 없지 않을까?

병원이나 법원에서나 일반인이 잘 모르는 전문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진행상황을 투명하고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오해가 상당히 있다고 생각된다. 이른바 '쌍방향 대화'의 결여가 '신뢰와 만족'의 결여를 낳고 있는 셈이다. 병원에서 의사가 중심이고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간호사를 비롯한 스텝들의 원활한 협력이 없다면 최선의 진료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다양한 구성원들이 함께 일하는 법원에서도 상호 이해와 존중, 양보와 협력이 신명나는 일터를 만들고, 그 활력과 자존감이 수준 높은 사법서비스로 이어지는 것은 마찬가지 이치일 것이다.

진료와 재판에 다른 점도 있다. 名醫가 있는 곳이라면 전국 어디나 찾아가 진료를 받을 수 있지만, 재판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관할이라는 이름으로 정해둔 법원에서 특정재판부에 사건이 배당되면 싫든 좋든 그 판사에게 자기 운명을 맡길 수 밖에 없다.

의료과실로 인한 손해배상책임과 법관의 잘못된 재판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의 차이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언젠가 법원에 견학 온 초등학교 학생들과 대화하면서 "의사가 잘못하면 책임을 지는데, 판사가 잘못하면 어떻게 되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조리 있게 설명하기가 곤란하여 난감했던 적이 있다. 사법권의 독립 보장, 악의적 당사자의 끊임없는 중상모략으로부터 보호, 상소제도를 통한 사법권 남용의 견제 가능 등 법관의 재판권 행사에 대한 면책을 설명하는 여러 가지 논리들이 일반 시민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이러한 법률적 책임의 감경이 오히려 판사에게 오판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심리적 중압감을 가중시키는 면이 있다고 항변한다면 터무니없는 자기합리화일까?

병원 문을 나설 때마다 앞으로는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여 다시는 병원 신세를 지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을 하곤 한다. 오늘 필자의 법정 밖을 나서는 많은 사람들이, 특히 형사재판의 피의자 · 피고인들이 이와 비슷한 굳은 마음가짐으로 아름답고 값진 인생을 살았으면 하고 기도해 본다.

-청주지법 제천지원장-

◇대법원이 매달 발간하는 '법원사람들'에 실린 유해용 청주지법 제천지원장의 글을 유 지원장과 '법원사람들'의 양해 아래 전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