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중재에서의 이해충돌 방지

"공정성 침해 우려, 시간, 효용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2017-10-12     김정덕
지난 9월 20일 "이해충돌의 방지-복잡해진 세상에서 중재의 정당성(legitimacy)을 유지하기"라는 주제의 유익한 강연이 서울국제중재센터(SIDRC)에서 개최되었다.

SIDRC 30회 강연

이날 강연을 맡은 Judith Gill QC는 영국 런던국제중재법원(LCIA)의 최초의 여성 원장이자 동시에 영국계 로펌인 알렌앤오버리(Allen & Overy)의 국제중재팀 시니어 파트너 변호사로, Chambers Global의 2017년도 평가에서 (국제)중재 분야 최고 등급인 'Band 1' 변호사로 평가받기도 했다. SIDRC가 대한상사중재원, 국제중재실무회와 공동으로 주최한 이번 강연은 SIDRC의 30번째 강연이다.



국내 대기업 A가 영국 기업 B와 대한상사중재원에서 국제중재를 하게 되었다. 국내 대기업 A는 한국 로펌 소속 변호사로서 국제중재 업계에서 명성이 있는 변호사 X를 배석 중재인으로 선임하였다. 그런데 중재 과정에서 변호사 X가 소속된 한국 로펌이 해당 대기업 A가 최근 인수한 해외 자회사에 대하여 수차례 자문 업무를 하고 수임료를 받은 사실이 밝혀졌다. 변호사 X는 위 해외 자회사 업무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상대방 영국 기업 B는 변호사 X에 대하여 중재인 제척 신청을 하였다. 과연 중재인으로 선정된 변호사 X는 자의로 중재인 지위에서 사임하거나 제척되어야 하는 것인가?

지난 20여년간 국제중재가 우리나라에서도 활성화되고, 주요 로펌들이 국제중재팀을 운영하면서 우리나라 실무가와 기업들도 중재인의 이해충돌(conflict of interests) 상황과 관련하여 어려운 문제들을 접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영어로 진행하는 국제중재 사건을 대리하거나 중재인이 될 수 있는 실무가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는 상황이고, 외국의 유명 중재인들도 반복적으로 선임되는 경우가 많아 중재인 선임 과정에서의 conflict 이슈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다.

사실관계 깊은 검토 필요

Judith 원장은 저명하고 노련한 중재인이자 중재 실무가답게 이 어려운 주제에 대하여 차근차근 본인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Judith 원장의 핵심 메시지는 중재인의 이해충돌 이슈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고, 개별 사안마다 그 특유한 사실관계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사실관계에 대한 깊은 검토를 하여야만 이해충돌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날 강의는 SIDRC 이사장인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신희택 교수의 사회로 ICC 중재법원 상임위원인 윤병철 변호사, LCIA 부원장인 박은영 변호사 등 우리나라 중재계의 리더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띤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다음은 Judith 원장의 강연 내용 요약.

중재는 분쟁 당사자의 합의에 따라 분쟁에 관한 판단을 법원이 아닌 제3자(중재인)에게 맡겨 그 판단에 따름으로써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중재는 당사자들의 합의를 통해 분쟁과 무관한 제3의 장소에서 수행될 수 있기 때문에 공정성과 중립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국제 비즈니스 분야에서의 분쟁 해결에 특히 자주 이용된다.

하지만 중재인들은 보통 변호사 등 타 직업을 겸하는 경우가 많고 중재인 · 중재 실무자의 풀이 좁은 점, 중재가 비공개로 진행되는 점으로 인해 중재에서는 이해충돌이 중요한 이슈가 된다.

최근 국제중재 사건이 증가하면서 문화권의 차이에서 오는 영향과, 인터넷의 발전으로 예전에는 파악하기 어려웠던 모자회사 관계 등에 대한 정보 취득이 가능해지면서 이해충돌 이슈가 더 자주 제기되고 있으며, 중재인에 대한 기피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경우 당사자들의 부담감 또한 감소하는 추세이다.

이해충돌은 중재제도에 대한 이용자들의 신뢰를 저해할 수 있어, 각국의 법제 및 중재기관들은 이해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여러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우리나라 중재법의 경우, 중재인은 공정성이나 독립성에 관하여 의심을 살만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지체 없이 이를 당사자들에게 고지하도록 하고 있으며(제13조 제1항), 당사자들은 중재판정부가 구성된 날 또는 그 사유를 안 날로부터 15일 이내에 중재인에 대한 기피신청을 할 수 있도록 절차를 마련하고 있다(제14조 제2항).

중재인에 대한 기피 요건

대부분의 나라의 중재법과 주요 중재기관의 규칙에서는 중재인에 대한 기피신청에 '합리적인(reasonable)' 또는 '정당화될 수 있는(justifiable)' 의심(doubts)이 존재할 것을 요구한다. 한국 중재법(제13조)도 마찬가지이다.

영국 법원은 'justifiable doubts'의 판단기준으로, 공정하고 사안을 잘 아는 제3자(fair minded and informed observer)가 해당 사실관계를 검토하였을 때 공정성이 침해될 현실적인 가능성이 있다고 볼 것인지를 들고 있다.(Porter v Magill [2002] AC 357)

세계변호사협회(IBA)는 2004년 "국제중재에서의 이해충돌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정하고 2014년 개정판을 배포하였다(이하 "IBA 가이드라인").

IBA 가이드라인의 한계



IBA 가이드라인은 양해 불가능한 적색 리스트(Nonwaivable Red List, 중재인과 일방 당사자가 동일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등), 양해 가능한 적색 리스트(Waivable Red List, 중재인이 해당 사건에 관하여 일방 당사자에게 법률자문을 제공한 경우 등), 황색 리스트(Orange List, 중재인이 과거 3년 내에 다른 사건에서 일방 당사자에게 법률자문을 제공하였거나 대리인으로 활동한 경우 등), 녹색 리스트(Green List, 중재인이 해당 사건에서 제기된 법률적 이슈에 관하여 과거에 학술논문이나 강의 등을 통하여 의견을 표명한 적이 있는 경우 등 이해충돌이 없는 경우) 등으로 나누어 이해충돌의 판단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IBA 가이드라인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실무 기준을 제공하는 장점이 있으나, 고지의무를 강조하여 과도한 기피신청을 야기할 수 있는 점, '합리적인(reasonable)'이나 '중대한(significant)' 등의 주관적인 기준에 의존하는 점 등이 한계로 지적된다. 특히 IBA 가이드라인의 한계를 지적한 영국 판결(W Limited v M Sdn Bhd [2016] EWHC 422 (Comm))의 태도는 특기할만 하다.

'편향' 이유, 중재판정 취소 청구

원고는 어느 단독 중재인이 내린 두 건의 중재판정이 명백히 편향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국 1996년 중재법 제68조에 근거하여 중재판정의 취소를 영국 법원에 신청하였다. 중재인은 캐나다 로펌의 원로 파트너였으나 실제로는 거의 대부분 중재인으로서의 업무만을 하고 있었고, 로펌에서는 수익을 분배 받지도 않고 있었다.

그런데 해당 로펌이 중재 피신청인 회사(C)의 계열회사(D)에 상당히 많은 법률자문을 제공하고 그로부터 상당한 수입을 얻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C와 D는 동일한 모회사(P)의 자회사였으며, 해당 로펌은 D회사에만 법률자문을 제공하였고 피신청인 C나 모회사 P에게는 법률자문을 하지 않았다)

이 상황은 IBA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양해 불가능한 적색 리스트'(1.4조, "중재인 또는 그 소속 로펌이 중재의 일방 당사자 또는 관련자에게 정기적인 조언을 제공하고, 그로부터 상당한 수입을 올리는 경우")에 해당하는 사안이다. 그러나 영국 법원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해충돌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재인 자신은 자문 안 해

-중재인이 소속된 로펌은 피신청인과 동일한 모회사에 소속된 다른 자회사에만 법률자문을 제공하였고, 중재인 자신은 자문을 제공하지 않았으며 중재인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비서와 행정 지원만을 받았을 뿐인 점을 고려할 때, 공정하고 사안을 잘 아는 제3자의 시각에서 중재인이 편향되거나 독립성, 공정성을 결여할 실질적인 가능성이 있다고 볼 여지가 전혀 없다.

또 P는 D를 공개적으로 합병하였음에도 로펌의 자체 점검과정에서 누락된 점 등을 고려할 때 이는 로펌의 실수일 뿐 중재인이 고의적으로 누락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IBA 가이드라인이 사전 체크 수단으로서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점은 인정된다. 그러나 구체적 사실관계를 감안하지 않고 중재인과 로펌의 관계를 일괄적으로 규율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본 사안과 같은 경우 당사자들이 양해할 여지도 있는 상황이다.

반면 IBA 가이드라인의 "양해 가능한 리스트"의 경우 (ⅰ)중재인이 일방 당사자에게 법률자문을 제공한 경우, (ⅱ)중재인의 가까운 가족이 중재 결과에 금전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경우 등을 포함하는데, 본 재판부가 보기에는 오히려 이러한 상황들이 본건의 경우보다 훨씬 중대한 상황으로 보인다.

Judith 원장은 위 사례를 통하여 영국 법원이 이해충돌의 판단에 있어 규정의 문언상의 형식적 요건보다는 구체적인 사안에서의 실체관계를 중심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는 입장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평가하였다.

Barrister와 Chamber

영국 특유의 법률 문화와 관련하여 중재에서 주요 이슈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 'Barrister'와 'Chamber' 제도이다. 영국의 법률 시스템에서는 법정에 출석하여 변론하는 일만 전담하고 직접 고객을 상대하지는 않는 '법정 변호사'(Barrister)와 고객과 접촉하고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무 변호사'(Solicitor)가 나누어져 있다. 로펌에 소속되어 일하는 Solicitor들과는 달리, Barrister들은 전통적으로 자영업자형태로 근무하면서 'Chamber'(일종의 공동 사무실)라는 형태로 행정업무, 사무실 운영 같은 부분만을 공유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단체로서 마케팅을 하는 등 전통적인 업무 형태에 변화의 조짐 또한 보이고 있다.

IBA 가이드라인은 로펌이 일방 당사자에게 법률자문을 제공한 경우 그 소속 변호사가 중재인을 맡아서는 안된다고 규정하면서도, 2014년 개정을 통하여 "Barrister와 Chamber의 경우에는 로펌의 소속 변호사와 같이 볼 수는 없다"고 규정하였다.

이는 Barrister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영국의 전통적인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이나, 영국 법조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비영국 문화권의 당사자들에게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서 슬로베니아 정부가 일방 당사자가 된 중재 사건이 있었는데, 중재 절차의 후반에 슬로베니아 정부가 의장중재인과 같은 Chamber 소속인 Barrister를 대리인의 일원으로 추가하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었다.

판정부, 이의 수용

비영국 출신의 변호인이 대리하는 상대방은 이의를 제기하였고, 판정부는 이의를 받아들여 해당 Barrister를 대리인에서 제외하도록 명령하였다. 판정부는 해당 Barrister가 계속하여 중재 절차에 참여할 경우 합리적인 제3자라면 의장 중재인의 독립성 및 공정성에 대하여 합리적인 의심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상대방에게 영국식 Chamber 시스템이 낯선 점, 해당 Barrister의 존재가 늦게 확인된 점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ICSID Case No. ARB/05/24)

Judith 원장은 국제중재에서의 이익 충돌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일률적인 기준이나 정답은 존재할 수 없으며 구체적인 사실관계에서 공정성이 침해될 우려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지 여부, 중재절차에서의 시간, 효용 및 중재절차의 정당성, 공정성, 신속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국제중재 사건이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분쟁 양상 또한 대단히 복잡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고 있는 중재인의 이익 충돌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최신 중재 경향 및 아이디어와 함께 Judith 원장의 연륜에서 나오는 탁월한 통찰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이철원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 cwlee@kimch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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