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과 부가가치세 납세의무자

[이종혁 변호사]

2017-06-01     김정덕
대법원은 사회적으로 논란이 있거나 파급력이 큰 사건들을 소부가 아닌 전원합의체에서 판단한다. 대법관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거나 기존 판례를 변경하는 등의 사유가 있을 때 전원합의체 판결이 선고된다. 본래 전원합의체 판결은 매우 드문데, 최근 세법에 대한 전원합의체 판결이 풍년이다. 필자는 지난 호에서 상속세 및 증여세법의 해석에 관하여 대법관들의 의견이 갈렸던 전원합의체 판결을 소개하였다. 이어서 여러 건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또 선고되었다. 이번 호에는 '신탁의 경우 부가가치세의 납세의무자가 누구인지'에 관하여 기존 판례를 획기적으로 변경한 전원합의체 판결을 소개한다.

어떠한 재산의 명의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을 명의신탁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부동산을 매수하면서 실제 매수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명의로 소유권이전등기를 하는 경우이다. 대외적으로는 명의수탁자가 소유자가 되지만, 둘 사이의 내부적인 관계에서는 명의신탁자에게 소유권이 남아 있다고 본다. 다만 부동산에 대한 명의신탁은 주로 탈세 등의 부정한 목적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무효이다.

부동산 명의신탁은 무효

이와 달리 아예 등기원인을 신탁으로 하여 등기를 마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신탁법의 규율을 받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유효이며, '신탁법에 의한 신탁'이라고도 부른다. 신탁은 특정한 재산의 관리, 처분 등을 수탁자에게 위탁하거나, 이를 담보로 대출을 받는 경우에 많이 이용되며, 신탁자, 수탁자외에 신탁에서 발생하는 이익을 받게되는 수익자가 별도로 존재한다. 실제 거래에서 신탁회사를 수탁자로, 금융기관을 우선수익자로 지정하는 형태의 신탁계약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신탁을 하게 되면 신탁재산을 둘러 싸고 위탁자, 수탁자, 수익자라는 3면의 이해관계자가 존재하게 된다. 이로 인해 신탁업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세금이 발생한 경우 납세의무자가 누구인지 문제 된다.

이에 관하여 신탁재산은 원래 위탁자의 것이었고 단지 관리, 처분 또는 담보 등을 위하여 수탁자 이름으로 등기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위탁자가 납세의무자라는 견해도 있고, 그 수익을 수익자가 가져가므로 수익자가 납세의무자라는 견해도 있다. 반면 신탁재산의 소유권은 등기를 마친 수탁자에게 있기 때문에 수탁자가 납세의무자라는 견해도 가능하다. 신탁관계에서 납세의무자가 누구인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에 따라 당사자 간의 계약내용도 달라질 것이고, 각자의 자력에 따라 국가가 확보하는 세수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소득세법 등은 납세의무자 명시

상당수의 세법에서는 납세의무자를 분명하게 정하고 있다. 예컨대 소득에 대해서 부과되는 세금인 법인세와 소득세는 수익자가 납세의무자이고, 수익자가 특정되지 않았거나 없다면 위탁자가 납세의무자가 된다. 재산세의 경우 예전에는 위탁자가 납부해야 했지만, 지금은 수탁자가 납부하도록 정하고 있다. 상속세의 경우 위탁자와 수익자가 같으면 위탁자가 사망한 경우 상속재산에 포함되어 그 상속인이 상속세를 납부해야 하지만, 위탁자와 수익자가 다르면 위탁자의 상속재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신탁에서 위탁자와 수익자가 다른 경우 수익자는 실제 신탁의 원본 또는 그 이익을 지급받은 때 증여세를 납부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부가가치세는 신탁에 관한 세금의 납세의무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부가가치세법상 신탁부동산이 공급되는 경우 부가가치세 납세의무자가 누구인지에 관하여 오랜 기간 동안 논란이 있어 왔다.

종래 대법원은 신탁을 위탁매매와 유사하게 보았다. 부가가치세법은 그 이익과 비용이 위탁자에게 귀속되는 위탁매매와 관련하여 위탁자를 납세의무자로 본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이에 대법원은 신탁에 관한 부가가치세도 그 이익과 비용이 최종적으로 귀속되는 위탁자 또는 수익자가 납부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원칙적으로 위탁자가 납세의무자가 되고, 위탁자 이외의 수익자가 지정되어 있는 경우에는 그 우선수익권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수익자가 납세의무자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세관청은 최근까지도 대법원의 태도와는 조금 다른 기준으로 부가가치세 납세의무자를 판단하였다. 원칙적으로 위탁자가 납세의무자라는 점은 대법원의 태도와 같았지만, 우선 수익권뿐만 아니라 신탁부동산에 대한 실질적 통제권까지도 이전되어야 수익자가 납세의무자가 된다고 보았다.

종전 판례 변경

그런데 최근 대법원은 판례를 변경하여 '신탁재산에 관한 부가가치세의 납세의무자는 수탁자이다'는 전원합의체 판결을 선고하였다(대법원 2017. 5. 18. 선고 2012두22485 전원합의체 판결). 과세관청이 신탁부동산에 대한 실질적 통제권이 위탁자에게 있다고 보고 부가가치세를 부과하자 위탁자가 이에 불복하였던 사건에서, 대법원은 위탁자도 수익자도 아닌 수탁자가 납세의무자가 된다는 제3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대법원은 판단의 근거를 부가가치세가 '거래세'라는 점에서 찾았다. 부가가치세는 거래의 외형에 대해서 세금을 매기는 거래세이므로, 소득세처럼 실제 이익의 귀속자를 찾을 것이 아니라 거래행위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사실 과세관청의 입장처럼 실질적 통제권이 이전되었는지에 따라 납세의무자를 다르게 보는 것은 거래의 불확실성을 높인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이 있었다. 특히 거래상대방인 매수인의 입장에서는 실질적 통제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또한 종래 대법원 판례처럼 우선수익권을 기준으로 보는 경우에도, 우선수익권자가 여러 명인 경우 납세의무자가 누구이고 그 비율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불분명한 문제 등이 있었다.

거래 불확실성 줄여

이번 대법원 판례는 법리적으로도 타당성이 있어 보이고, 거래의 불확실성을 줄인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는 바람직한 견해로 보인다. 다만 지금까지 신탁업계에서 오랫동안 처리해온 실무와 다르고, 위탁자와 수탁자 사이의 거래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는 확실히 정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분간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 대하여도 법원이나 과세관청이 곧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기를 희망한다.

◇대법원 판결 판시내용="수탁자가 위탁자로부터 이전받은 신탁재산을 관리 · 처분하면서 재화를 공급하는 경우 수탁자 자신이 신탁재산에 대한 권리와 의무의 귀속주체로서 계약당사자가 되어 신탁업무를 처리한 것이므로, 이때의 부가가치세 납세의무자는 재화의 공급이라는 거래행위를 통하여 그 재화를 사용 · 소비할 수 있는 권한을 거래 상대방에게 이전한 수탁자로 보아야 하고, 그 신탁재산의 관리 · 처분 등으로 발생한 이익과 비용이 거래상대방과 직접적인 법률관계를 형성한 바 없는 위탁자나 수익자에게 최종적으로 귀속된다는 사정만으로 달리 볼 것은 아니다."

이종혁 변호사(법무법인 율촌, jonghlee@yulch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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