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세서 기재뿐 아니라 공지기술도 참작하라

2015-07-14     원미선
대법원에 상고이유서를 제출하고 4개월만에 결론이 나왔다면, 대개는 심리불속행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법률심의 속성상 원심판결을 그대로 확정하는 것이 아니면 그렇게 신속하게 심리를 진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원이 최근 만들어가고 있는 법리를 발전시키는 일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한 기업의 권리구제에 꼭 필요한 것이라면 항상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지난 1월 24일 상고이유서를 제출하고 5월 14일 파기환송 판결을 받은 사건(대법원 2015. 5. 14. 선고 2014후2788 판결)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하급심에서 당한 봉변

의뢰인 회사는 '공기순환 냉각형 엘이디(LED) 등기구'를 제조하는 업체였다. 기업의 규모는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전문 연구인력을 두고 1년에 수십 개의 특허와 디자인을 출원해 가며 나름 착실하게 기술개발과 디자인 개발을 해나가는 기업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주위의 등기구 제조업체들이 자신의 기술과 디자인을 따라해 고민이었다.

솔직하게 인정하는 업체들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치기도 하였는데, 특정 업체는 특허권을 출원하는 자신을 비웃곤 하더니 적반하장격으로 소극적 권리범위 확인심판을 특허심판원에 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특허심판원은 물론이고 특허법원마저도 심판청구인의 확인 대상발명은 의뢰인 회사의 특허권의 권리범위에 속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특허심판원과 하급심 법원의 견해는 대법원이 2014. 7. 24. 선고한 2012후1132 판결에 대한 인식 차이에서 나온 것으로 보였다. 지적재산권 관련 판례들 중에서 이 판결은 지난 1년 동안 가장 주목 받은 판결이 아닐까 싶다.

이 판결은 균등침해를 인정하기 위한 세 요건 중의 첫 번째 요건인 '과제해결 원리가 동일할 것'이라는 요건이 충족되는지 판단하는 방법에 관하여 설시하면서, 명세서 기재뿐 아니라 출원 당시의 공지기술 등을 참작하여 선행기술과 대비하여 볼 때 특허발명에 특유한 기술사상의 핵심이 무엇인가 탐구해보라고 하였던 것이다.

대법 판결과 달리 공지기술 공제

그런데 이 판결 어디에도 "출원 당시의 공지기술은 특허발명에서 모두 제외하고 그 나머지만이 기술사상의 핵심"이라고 판단한 바는 없다. 그럼에도 특허심판원은 심판청구인이 제출한 공지기술을 열심히 분석하여 특허발명에서 일치하는 부분은 모두 이를 공제하고 특허명세서에 기재되어 있는 바도 그것이 조금이라도 공지기술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보이면 모두 제외하는 방식으로 기술사상의 핵심을 재창조해내고는 그러한 재창조된 기술사상은 확인 대상발명에 들어있지 않다고 하여 권리에 불속(不屬)한다는 판단을 하였다. 특허법원의 경우도 기본적으로 같은 흐름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의뢰인이 가장 황당해 한 부분은, 자신이 핵심기술이라고 생각하여 개발하고 구체화해서 특허명세서에 분명하게 적어 놓은 기술적 요소들을 국가기관에서 (그중 일부가 선행기술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이 사건 특허의 핵심기술사상이 아니라고 한 것이었다. 발명자가 기술사상의 핵심이라고 한 것을 명세서에 기재해두었는데(더욱이 위 2014년 판결도 분명히 명세서 기재를 참작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것을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판단을 도대체 기술개발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지 필자로서는 지금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외적 증거로 내적 증거 무시 못해

이러한 이해는 2014년 대법원 판결의 '공지기술도 참작하라'는 설시를 다소 독자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는 관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하급심의 판단대로 하자면 특허명세서에 명백하게 기재되어 있는 것이라도 이를 제외하고 보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에 특허발명의 핵심기술사상은 발명자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명세서의 기재와 출원 당시의 공지기술 등을 참작"하여 기술사상의 핵심을 보라는 말은 "명세서의 기재에서 공지기술을 공제한 나머지만을" 기술사상의 핵심으로 보라는 말은 아니라고 보인다.

어떠한 특허라도 그 기술적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세서의 기재가 당연히 필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으며(이른바 내적 증거), 출원 당시의 공지기술이 어떠하였는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배경이 될 것이다(이른바 외적 증거). 대법원 2009. 10. 15. 선고 2007다 45876 판결 등에서 여러 번 확인된 원칙이다. 외적 증거에 의하여 명백하게 기재되어 있는 내적 증거를 없는 것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

이 사건의 의뢰인은 이른바 작고 강한 강소기업이었는데, 이런 경우에 있어서는 대기업의 경우보다 법원의 판단 하나하나에 더 큰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한두 개의 품목(item)이 그 기업의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특허침해와 관련해 가능한 한 명확한 기준을 세우는 것은 모든 법률가의 임무일 것이다. 그래야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이 예측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세상에 완벽하게 명확한 기준이라는 것은 없다. 오죽하면 가장 명확한 법전을 만들고자 하였던 나폴레옹이 자신의 민법전(이른바 나폴레옹 법전)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을 제시하며 주석서를 만들어내는 법률가들을 저주하였다는 일화가 있겠는가. 그러나 적어도 대법원의 판례를 오해하여 대법원이 제시한 기준을 더욱 불명확한 것으로 만드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할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대법 판례 오해 없어야

살인적인 업무량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올바른 결론을 내주신 대법관 이하 대법원 관계자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작년 말 상고심 단계에서 수임하여 의뢰인과 함께 노심초사하면서 상고이유서를 준비하였던 기억과 함께 이 사건은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이 될 것 같다.

박성수 변호사(김앤장 법률사무소, seongsoo.park@kimch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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