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는 경험의 보고다

[이규화 변호사]

2014-05-19     김진원
"아니 합작관계를 시작하기도 전에 합작관계를 어떤 경우에 종료할 것인지에 대하여 규정을 하면 어쩌자는 겁니까? 합작을 하자는 거예요 말자는 거예요? 합작이란 것이 서로 합심해서 노력하더라도 쉬운 것이 아닌데 이렇게 처음부터 어떻게 끝낼까에 대하여 생각하는 상대방과 어떻게 합작을 하겠어요."

예전보다 많이 적어지기는 하였지만 요즈음도 합작계약서를 만들다 보면 한국 측 계약상대방으로부터 가끔 듣는 불만이다. 분쟁해결 조항에 대해서도 같은 반응을 접하는 경우가 있다. '계약도 하기 전에 분쟁이 생길 것을 예상하여 그 해결방안을 정하려고 하다니, 이 사람들은 벌써 싸울 생각만 하고 있는 것 같아 사업을 같이 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불안하다'는 반응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뭐 이런 것까지 계약서에 규정할 필요가 있나'하는 반응이다.

필자도 아주 오래 전에 제대로 된 합작계약서를 처음 접할 기회가 생겼을 때 비슷한 생각을 하였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달랑 몇 쪽에 불과한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에 익숙해 있던 시절, 거의 100여 쪽에 달하는 계약서를, 그것도 영어로 된 계약서를 받아 들고 어안이 벙벙했었다. '아니 뭐 그렇게 할 말이 많길래 이렇게 긴 계약서를 만들어 보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영문으로 된 100여쪽 계약서

영미 식의 복잡한 계약서에 어느 정도 익숙해 가던 2000년대 중반, 독일에서 합작계약의 협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필자의 의뢰인인 한국 회사가 독일 중견기업의 주식 일부를 기존 대주주인 사장님으로부터 매수함과 동시에 이 회사의 유상증자에도 참여를 하는 방식의 M&A 거래였다. 더구나 매수대상인 독일 회사의 대주주인 사장님도 한국에서 의뢰인 회사와 합작을 하는 것을 동시에 진행하는 거래여서 고려할 사항이 무척 많았고 계약서도 여러 종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한참 협상을 하는 도중에 나이가 지긋하신 독일 회사 사장님이 필자에게 갑작스러운 질문을 하였다. "Mr. Lee는 혹시 미국에서 Law School 나왔나요?" 왠 뜬금없는 질문일까 의아해 하면서 '그렇다'고 건성으로 대답을 하였다. 잠시나마, 혹시 계약 협상을 너무 잘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여 미국에서 제대로 교육을 받았다고 칭찬을 하려나 하는 근거 없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독일도 우리와 같구나'

돌아 온 사장님의 반응은 의외였다. 계약서 내용에 대하여 협상을 하는 것을 보니 미국변호사들이 하는 것처럼 미주알고주알 다 계약서에 넣으려고 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 사장님은 그러나 독일에서는 계약서를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어떻게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경우를 다 생각하고 그 해결방안까지 생각해서 지금 그 내용을 다 계약서에 넣을 수 있나? 지금 생각하는 해결방안이 정말 합리적인 방안인지 어떻게 장담을 하나? 실제로 일이 발생하였을 때 당사자간에 긴밀하게 협의를 하여 해결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독일도 영미식으로 복잡한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필자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 독일도 우리와 같구나.'



이제는 많은 분들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는 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 영미 식의 복잡하고 방대한 분량의 계약서를 본격적으로 접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말 소위 IMF 금융위기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모든 한국 기업들이 어려웠던 시절, 물밀듯이 들어오던 외국 자본이 제일 앞에 내세운 것은 잘 훈련된 M&A 전문 변호사와 그들이 작성한 방대한 분량의 계약서였다.

방대한 계약서 앞세워 진출

당시 이제 겨우 소위 자문변호사가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알아 가던 필자로서는 거대한 쓰나미로부터 한국 기업의 이익을 보호, 대변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마치 독립투사인양 한국 기업을 대리하여 계약서 협상에 임하곤 했다. 이제 와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왜 그런 조항이 들어가야 하는 지, 그 조항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 지도 제대로 모른 채 고군분투했다. 왜 그리 계약서가 길고 복잡하던지, 참 난감했던 기억이 새롭다.

짧고 간결하게 작성한 계약서와 길고 복잡하게 작성한 계약서 중 어느 것이 좋을까? 물론 정확한 답이 없는 질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길고 복잡한 계약서에 더 의미를 둔다. 길고 복잡해야 변호사의 역할이 증대하고 보수를 많이 받을 수 있어서? 길고 복잡한 계약서를 잘 다루어야 능력 있는 변호사로 보여서? 아니다. 길고 복잡한 계약서는 그 계약서를 준비한 기업의 역사를,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기업에서 근무하였던 모든 사람들의 경험을 대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계약서는 일종의 기록문화유산

길고 복잡한 계약서의 내용 중에는 과거에 비슷한 거래를 하면서 실제로 발생하였던 사안들에서 기인한 조항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즉, 그냥 머리 속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계약서를 만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문제가 되었던 사안들에 대한 처리 경험, 또는 그에 대비한 계약서 조항이 없었기 때문에 생겼던 문제점들에 기초하여 이를 보완하고 대비하는 차원에서 생겨난 조항들이 많다. 상상 속의 작문이 아닌 실례에 근거한 절절한 의미를 포함한 조항들인 것이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을 한다면 일종의 기록문화유산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길고 복잡한 계약서 양식이 또는 그런 계약서를 작성하는 관행이 자라지 못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영미, 특히 미국과 달리 하나의 문화와 전통을 지닌 동일체 집단이 오랜 기간 쌓아 올린 상관습은 굳이 복잡한 계약서를 작성할 만큼 다양한 거래 형태를 발전시키지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 또한 송상, 경상, 만상, 보부상 등 강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상인집단 중심의 상행위 역시 개개의 상인들이 다양한 상행위 또는 계약형태를 만드는 것을 어렵게 하였을 것이다. 그 근저에 존재하였던, '상거래는 천한 생업'이라 치부했던 선비중심사상도 다양한 상업 형태의 발전과 그에 수반하는 각종 계약서의 발달을 근본적으로 방해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변하였다. 우리는 세계의 몇 안 되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여 전 세계의 수많은 나라와 교역을 하고 있다. 그에 따라 너무나 다른 수많은 형태의 거래와 상관습을 이해하고 이를 적절히 수용하여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혁신적인 거래방법이나 형태를 만들어야 하고 새로운 시도에 따라 발생하는 많은 문제점도 해결하여야 한다. 새로운 지식과 경험의 홍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그 수많은 새로운 지식을 어떻게 우리 시대의 상인들이 공유하고 그 처리 경험을 우리의 후배 상인들에게 전수할 수 있을까?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필자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단 이를 기록하는 것이다. 즉, 계약서에 이 경험들을 담아 우리의 동료들이, 후배들이 이를 익히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유일하지는 않더라도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문자의 발명, 사용이 중요

요즈음 잘 나간다는 인문관련 서적을 읽은 적이 있다. 아주 간략히 요약하자면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을 점령하고 지배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왜 어느 민족은 먼저 발전하여 지배자가 되고 다른 민족은 발전을 하지 못하다가 피지배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내용의 서적이다. 그 내용 중에 유독 필자에게 공감을 준 부분이 있다. 문자의 발명과 그 사용이 발전한 민족, 지배자가 된 민족과 그 반대의 민족을 구분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라는 지적이다. 문자는 경험과 지식을 동시대의 사람들과 공유하고 후세에 전달하는, 아직까지는 인류가 발명한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최초의 금속활자나 지금도 경탄이 절로 나오는 팔만대장경을 만든 문화를 가진 나라이다. 찬란한 기록문화의 전통이 우리의 피 속에 흐르고 있다. 국제적인 상거래를 빼고는 우리의 생활을 하루도 생각할 수 없는 요즈음, 새로운 세상을 헤쳐가기 위해 유용하고도 필수적인 도구인 계약서에도 우리의 찬란한 기록문화를 실현하자고 한다면 너무 거창한 주장일까?

◇법무법인 광장의 M&A팀을 이끌고 있는 이규화 변호사는 한글과컴퓨터 인수, 금호생명 인수, 대우조선해양 매각 자문 등 수많은 M&A 거래를 수행했다. 사법연수원 수료 후 미 튤레인대 로스쿨(JD)로 유학, 뉴욕주 변호사 자격까지 갖췄으며, 국내외 매체로부터 M&A 분야를 대표하는 리딩 로이어로 단골로 소개되고 있다.

이규화 변호사(kyuwha.lee@leeko.com)

Copyrightⓒ리걸타임즈(www.legaltimes.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