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과 입법의 상호작용"판결이 법률 정비 이끌어내는 경우 많아"

차한성 처장, 대법 전원합의체 역할 강조

2013-07-05     김덕성


법률이 바뀌면 판결이 바뀐다. 재판에서 적용해야 할 실정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판결은 입법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차한성 법원행정처장에 따르면, 법원의 판단이 입법적 논의를 촉발시키거나 아예 법률의 개정 또는 정비로 이어지기도 한다.

차 처장은 6월 26일 오전 조찬을 겸해 열린 한국법제연구원 주최 제14회 입법정책포럼에 발제자로 참석하여 "변화의 시대, 사법의 역할과 입법정책"이라는 주제로 발표하고, 판결과 입법의 상호작용에 대해 상세한 분석을 내놓았다.

서울 팔래스호텔에서 진행된 이날 발표에서 차 처장은 "법률의 개정이 판례의 변천을 이끄는 것이 원칙"이라고 전제하고, "그러나 2009년 5월 선고된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전원합의체 판결, 2003년 11월의 피의자신문시의 변호인 참여권 보장, 2004년 12월에 나온 검찰조서의 실질적 진정성립 요구 판결처럼 법원의 판단이 입법적 논의를 활성화시키거나 법률의 정비를 이끌어 내는 경우도 있다"고 소개했다.

차 처장에 따르면, '2009년 김할머니 사건'으로 알려진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전원합의체 판결(2009다17417)에서 대법원은 회복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른 후에 환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연명치료의 중단을 허용해야 한다고 판결, 곧바로 입법 논의를 촉발시켰다. 2010년 정부는 법제화를 위한 1차 합의안을 도출했고, 2012년 5월 29일엔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주관 공청회가 열렸다.

2006년 성전환자의 호적정정을 허용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도 입법 논의를 촉발시켜 그해 10월 성전환자의 성별변경 등에 관한 특별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으나 폐기됐다. 이 판결에서 다수의견은 사회통념상 남성으로 평가될 수 있는 성전환자에 해당함이 명백하면 호적정정 및 개명을 허가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고 판결했고, 현재는 대법원 예규인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에 의해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다수의견은 판결 당시 "호적법이 성전환자의 호적정정 절차 규정을 두지 않은 이유는 입법자가 불허했기 때문이 아니라 입법 당시에는 미처 그 가능성과 필요성을 상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피의자신문시의 변호인 참여권 보장, 검찰조서의 실질적 진정성립 요구, 공서양속에 반하는 이자약정 무효, 지급이자 반환청구 가능, 정리해고 판결 등은 입법이 판결을 수용해 반영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2003년 11월에 선고된 피의자신문시 변호인의 참여권을 보장한 대법원 결정(2003모402) 이후 2007년 6월 형사소송법이 개정돼 변호인 참여권 등을 보장한 243조의 2가 신설됐다.

또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하여도 피고인의 진술에 의하여 형식적 진정성립 뿐만 아니라 실질적 진정성립이 인정된 때에 한하여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취지의 2004년 12월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02도537)이 선고되자 판결과 같은 내용으로 형사소송법 312조 1항이 개정됐다.

대법원은 2007년 2월 15일 전원합의체 판결(2004다50426)을 통해 "사회통념상 허용되는 한도를 초과하여 현저하게 고율로 정해진 이율은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하여 무효이며, 무효인 이자약정에 기해 지급된 이자는 불법원인급여이나, 불법성 비교론에 의해 차용인은 이자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한달 쯤 뒤인 3월 28일 "채무자가 최고이자율을 초과하는 이자를 임의로 지급한 경우에는 초과 지급된 이자 상당금액은 원본에 충당되고, 원본이 소멸한 때에는 그 반환을 청구할 수 있다"는 내용의 2조 4항이 포함된 이자제한법이 제정됐다.

이에 앞서 대법원이 1989년 5월 23일 87다카2132 판결에서 제시한 정리해고의 4가지 요건은 1997년 구 근로기준법 개정시 31조 1항, 2항에 반영되어 현행 근로기준법 24조로 이어지고 있다. 주로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선고된 내용이 입법으로 반영되는 경우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차 처장은 "대법원이 사회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사건에 관하여 원칙적으로 전원합의체에서의 심도 있는 토론을 거쳐 법의 참된 지혜를 밝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법적 안정성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체되어서는 안 된다(The law must be stable, but it must not stand still)'는 로스코 파운드(Roscoe Pound)의 말을 인용하며 이날 강연을 마쳤다.

입법정책포럼은 2012년 3월 한국법제연구원에서 발족한 포럼으로, 월 1회의 조찬모임을 통해 새로운 입법과제의 발굴, 입법성과에 대한 검토 및 평가를 해 오고 있다.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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