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이른 유동성 함정 우려
때 이른 유동성 함정 우려
  • 기사출고 2009.03.06 09:18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상일]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이란 말이 이제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지난 2월 12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를 2%로 0.5%p나 대폭 내릴 때 기자들은 이성태 한은 총재에게 유동성 함정의 가능성을 질문했다.

◇이상일
유동성 함정이란 금리를 아무리 내려도 투자와 소비가 살아나지 않는 그야말로 통화정책의 무덤같은 상황을 말한다. 1930년대 대공황 상황을 경제학자 케인즈가 유동성 함정이란 말로 표현했다. 금리가 아주 낮아져도 시중의 돈 흐름이 금리에 반응하지 않는 상황이다. 시중에 돈은 왕창 풀려 있는데 돈이 돌고 있지 않는 것이다.

통화정책의 무덤같은 상황

이 총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직 유동성 함정을 크게 걱정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라며 "다만 워낙 금리가 빨리 내려 온데다 여전히 신용위험에 대한 우려가 커서 실물쪽이나 금융쪽에 나타나는 징후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고 당분간 세밀하게 살필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의 경제상황이 과연 대공황과 유사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인식이 나올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는 것일까. '유동성 함정'이란 말까지 기자회견에서도 등장했으니 말이다. 신문을 보면 유동성 함정이란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경기 침체는 가속화되고 실업은 급증하고 있다. 그런데도 실제 시중 돈의 흐름은 간단치 않다. 현재 예금상품의 금리는 모든 물가를 감안하면 모두 마이너스라는 말까지 나돈다. 금융기관에 돈을 넣어둬 봐야 앉아서 손해를 보고 있다는 말이다.

지난해 10월 이후 금리를 3.25%p나 대폭 내려 4개월여만에 절반 이하로 낮췄는데도 실물경제 침체가 가속화되는 탓이다. 금리를 낮춰도 소비나 투자가 일어나기는커녕 은행 단기상품인 MMF에는 매달 수조원씩 몰려 2월 20일경에는 120조원 이상에 달했다.

MMF에 매달 수조원씩 몰려

미국의 기준금리는 0.25%수준으로 내려섰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제로금리' 수준, 돈을 맡기고 쓰는 대가가 거의 공짜라는 것이다.

경제이론상 금리가 아주 낮은 수준으로 내려가면 사람들은 저축을 해봤자 손해 보기 때문에 돈을 쓰게 된다. 즉, 현재의 소비를 장래의 저축보다 높게 평가하게 된다. 기업들도 금리가 낮아지면 투자할 의욕을 보이게 된다. 낮은 금리는 투자에 따른 리스크를 줄여주기 때문이다.

소비와 투자가 일어나야 할 그런 '당연한' 흐름이 유동성 함정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소비와 투자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거꾸로 보면 현금을 더 선호하는 현상의 반대 면이다. 개인이나 기업인 모두 어느 정도 물가상승으로 인해 현금가치가 떨어져도 현금을 갖고 있겠다고 버티는 것이다.

미래가 불투명한 탓이다. 직장에서 감원될지 모르고 기업이 부도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선 현금을 예비로 갖고 있어야 안심이 되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다.

사실 지금 한국 상황을 유동성 함정으로 단정 짓기에는 너무 이른지 모른다. 표면상 한국은행 기준금리가 2%대로 떨어졌고 은행 예금 금리는 3%대로 급격하게 내렸다.

그러나 은행 외의 금융기관으로 눈을 돌리면 실제 수신금리는 이보다 훨씬 높다. 저축은행의 금리는 1년 기준으로 4~5% 수준이다. 1월초 8%대에서 급격하게 내렸지만 여전히 높다.

실질금리 아직 플러스

은행 창구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한산하지만 저축은행 창구에 가보면 번호표를 받아 한참 줄서서 예금해야 한다. 더욱이 새마을금고나 신협 등 그 외 수신기관들은 비과세 예금 혜택 등을 내세우며 수신 유치에 나서고 있다. 물가상승률을 제외한 실질금리가 아직 플러스여서 소비자들을 돈 쓰도록 몰기에는 이르다.

그런 은행 외의 금융기관들은 높은 금리로 받은 돈을 어디로 운용하겠는가. 그보다 높은 금리로 대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돈을 쓰는 기업들은 중소기업이나 부도직전에 몰린 기업이다. 부도를 막기에 바쁜 기업들로선 투자할 형편이 안 되는 것이다.

또 은행들의 경우 수신금리는 3%대이지만 창구에 가서 대출을 받으려고 하면 여전히 6~7%대의 대출금리를 부른다.

한국은행 기준금리만 2%대로 내려왔을 뿐 금융기관들의 수신, 대출 금리는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그래서 소비와 투자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지 모른다.

적어도 한국의 경우 유동성 함정을 거론하기에는 때 이른 감이 있다. 정부와 한국은행, 그리고 금융기관사이에는 금리 정책의 시간차와 간격이 있는 것인지 모른다. 뒤집어보면 유동성 함정을 거론할 정도로 경기침체가 아직 본격 진행되지 않고, 과정 중에 있는지도 모른다. 정말 유동성 함정을 겪지 않도록 일선 금융기관들도 대출금리를 빨리 내려 경제상황 악화를 막아야 할 것이다.

이상일 경제칼럼니스트(bruce59@paran.com)

Copyrightⓒ리걸타임즈(www.legaltimes.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