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현 전 ICC 소장, "한국의 위상, 리더십이 가장 출중하게 빛나는 국제조직이 국제형사재판소"
송상현 전 ICC 소장, "한국의 위상, 리더십이 가장 출중하게 빛나는 국제조직이 국제형사재판소"
  • 기사출고 2022.11.15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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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보적 정의 넘어 치유적 · 회복적 정의 실현되어야"

오랜 내전이 종료된 나라에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경제복구자금의 즉각적 지원일까, 기본적 형사정의시스템을 설치하는 일일까?

국제형사재판소(ICC) 재판관과 소장을 역임한 송상현 서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정답은 후자에 있다. 송상현 전 소장은 11월 11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재)송상현국제정의평화인권재단 창립 기념 심포지엄에서 기조강연을 통해 "여지껏 대부분의 경우에는 현지에 파견된 경제전문가들이 경제원조의 현실적 타당성을 담은 보고서를 올리면 World Bank 등 경제원조기구들이 막대한 자금을 신속히 지원해왔으나, 전쟁 후의 파괴와 민심의 타락,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기본적 기제의 흠결로 인하여 막대한 경제원조자금은 부패한 정부나 소수의 독재자 또는 그에 유착된 조직범죄집단의 먹잇감이 되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다"고 지적하고, "기본적인 선악을 가려줄 수 있는 기초적 형사정의 시스템이 먼저 도입되어서 국민들에게 사필귀정의 인식, 즉 결국 죄짓고는 못산다는 의식을 심어준 다음에 경제적 지원자금이 집행되어야만 훨씬 더 효율적 결실을 맺게 된다"고 갈파했다.

송상현재단 창립 기념 심포지엄 열려

송 전 소장에 따르면, 국제경제개발기구들은 오랫동안 자기들의 활동이 정의와는 관계없다는 태도를 견지해왔다고 한다. 송 전 소장은 그러나 "이제부터는 구체적 개발지원의 결정을 하기 전에 형사정의 실현기구인 국제형사재판소와 처음부터 협력하여 그 나라의 사법시스템의 회복, 법조인의 훈련, 필수적 법률의 제정 등 어느 정도 법적 얼개를 만든 다음에 구체적 경제지원을 해야 국내 평화와 안정이 빨리 정착된다"며 "이제부터 국제개발기구의 구체적 경제원조 패키지에는 반드시 정의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구체적 예산이 포함되어야 함이 새로운 시대적 요구가 되었다"고 강조했다.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이 11월 11일
◇송상현 전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이 11월 11일 "응보적 정의를 넘어 치유적 정의, 회복적 정의로-No Sustainable Peace, Without Justice"란 주제로 열린 송상현재단 창립 기념 심포지엄에서 기조강연하고 있다.

국제형사재판소에선 국제개발기구의 도움없이 여러 나라의 사법 요원의 훈련을 담당한 일도 있었다. 송 전 소장은 그러나 "그들은 오랜 전쟁이나 독재 하에서 민주주의나 법치 절차를 잊었고 심지어는 원고와 피고를 구별할 줄도 모른다"며 "국제분쟁현장에서 형사정의 시스템의 선제적 구축이 없이는 아무리 돈을 퍼부어도 지속가능한 평화와 안정은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회고했다.

이날 "국제형사재판소를 통하여 구현하고자 하는 정의, 평화 그리고 인권" 주제의 강연에서, 그가 주목한 또 하나의 화두는, 세계평화를 중대하게 위협하거나 교란한 자를 수사하고 기소하여 소추된 자를 처벌하는 응보적 정의를 넘어 피해자를 위한 치유적 정의(reparative justice)와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의 실현. 이날 심포지엄의 대주제도 "응보적 정의를 넘어 치유적 정의, 회복적 정의로-No Sustainable Peace, Without Justice"였다.

ICC가 운영하는 피해자신탁기금(Trust Fund for Victims)이 대표적인 예로, 신탁기금에선 관할 범죄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보호하고 보상하며 그들이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여 스스로 의미있는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다각도로 돕고 있다. 특히 재판소의 결정에 따른 보호조치도 있지만, 신탁기금이 재판 전에 구호의 손길을 뻗치는 선제적인 경우도 많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ICC 신탁기금에선 아프리카 전쟁지역을 수차 방문하여 사지를 잘린 사람에게 의수족을 부착해주고, 귀, 코, 입술 등이 도려내진 사람에게는 성형수술을 해주며, 강간 피해자는 그들이 트라우마를 극복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심리상담을 제공한다. 또 몇 푼의 손해배상금보다도 피해자인 대부분의 엄마들이 요구하는 대로 지역사회에 기초한 어린이 학습 교과서와 장난감을 제공하는가 하면 소년병을 탈출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생계를 꾸릴 수 있도록 미소금융을 해주기도 하는 등 다각도로 피해자를 돕고 있다.

송 전 소장은 "인류 5천년 역사에 평화교란자를 처단함에 그치지 않고 범죄피해자와 그 가족을 보호하고자 다각도로 그들의 자립을 돕는 기능을 하는 법원이라는 점에서 국제형사재판소는 인류 최초의 가장 중요한 사법적 기구"라고 평가하고, "국제형사재판소가 추구하는 정의, 평화,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선제적으로 회복해주는 인권의 현대적 의미가 여기에 있고, 이 귀중한 초유의 실험이 실패하면 안된다"고 역설했다.

"ICC, 폭력 억지 요인으로 작용"

송 전 소장은 ICC가 비록 설립근거조약(로마의정서)을 비준하여 회원국이 된 나라(현재 123개국) 이외에는 원칙적으로 재판권이 미치지 않는 한계가 있지만, 1998년 로마의정서 채택으로 ICC가 탄생한 이후 전 세계인이 중대한 국제범죄에 대응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등 몇 가지 의미 있는 변화가 있다고 주목했다. 다부족으로 구성된 많은 아프리카의 나라들이 대통령 선거 등의 정치일정을 치룰 때마다 일어났던 부족간의 유혈과 무고한 민간인의 살상이 ICC의 소추가 두려워서 예방되고 있는, 즉 국제형사재판소의 수사와 처벌에 대한 위험성이 폭력 억지(deterrence)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송 전 소장은 "수많은 아프리카의 정부 고위관계자의 증언이 이를 증명한다"며 "국제형사정의 없이는 지속가능한 세계평화는 없다(No sustainable peace without international criminal justice)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고무적으로 이야기했다.

"한국의 위상과 영향력, 선도적 리더십 등이 모든 면에서 가장 출중하게 빛나는 국제조직이 국제형사재판소입니다."

송 전 소장은 "회원국을 장악하여 재판소를 이끌어가는 능력은 단연 한국이 최고라고 인정받고 있다. 한국법조인의 탁월한 과학수사능력, 한국감사원의 ICC회계감사를 통한 우수한 감사능력, ICC재판관들의 공정하고 효율적이고 세심한 재판능력, 그리고 뛰어난 사법행정 내지 관리능력은 ICC를 통하여 전 세계에 빛을 발하고 있다"며 "우리 모두 이 국제형사정의시스템을 잘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선 송 전 소장의 기조강연에 이어 경희대 김진 교수가 "전환기 정의와 국제형사재판소의 역할-치유와 회복을 통한 정의, 평화, 인권의 길"이라는 주제로, 서울시립대 박훈 교수가 "정의평화인권과 국제조세-국내와 법분야를 넘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또 황철규 전 국제검사협회 회장이 좌장을 맡아 명지대 이윤제 교수, 서울대 이창희 교수, 서울대 이근관 교수가 토론자로 참가한 가운데 종합토론을 펼쳤다.

김용덕 송상현재단 이사장은 개회사에서 "이번 심포지엄은 송상현재단의 설립 취지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재단에서 최초로 개최하는 뜻깊은 행사"라며 "송상현재단의 설립 이념에 맞추어, 정의 없이는 지속 가능한 평화가 불가능함을 되새기고, 응보적 정의를 넘어 치유적 정의, 회복적 정의 추구라는 큰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실천적 방안에 관하여 중지를 모으는 역사적인 한마당이 되리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11월 11일 송상현재단 창립 기념 심포지엄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11월 11일 송상현재단 창립 기념 심포지엄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격려사에서 "송상현 교수님은 '처벌을 통한 응징'이 아닌 '회복과 치유'를 국제형사재판소의 핵심 가치로 삼아 피해자 신탁기금 기능을 강화해 피해자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 애쓰기도 하셨다"며 "세계가 감염병과 전쟁 그리고 기후변화 위기에 직면해 있는 이럴 때일수록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가 침해받지 않도록 보듬어야 하고, 송상현재단이 그 역할을 해주실 것으로 믿는다"고 송상현재단의 창립을 축하했다.

김영주 국회부의장은 축사에서 "'응보적 정의를 넘어, 치유 · 회복적 정의로!'라는 심포지엄 주제에도 송상현재단 출범의 취지가 잘 녹아있다고 생각한다"며 "앞으로 재단이 펼쳐나갈 사회적 역할에도 큰 관심을 두게 되고, 저도 치유와 회복을 통한 더 나은 사회 만들기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도록 힘을 모으겠다"고 말했다.

조은희 국회의원은 축사에서 "송상현 교수님께서는 국제 사법기구인 국제형사재판소의 초대 재판관과 재판소장을 역임하시며 범죄로 인한 피해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문제에 집중하셨는데, 전쟁과 집단학살, 무력을 이용한 침략, 반인도범죄와 같은 중대범죄는 가해자를 응징하는 것만으로 피해자의 상흔을 보듬고 치유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는 먼 과거의 일이 아니다. 가장 가깝게는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포화로 신음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피해 회복과 미래를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저는 송상현 재단의 이후 활동에서 그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길 고대한다"고 덧붙였다.

송상현재단(https://www.song-foundation.org)은 제2대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을 역임한 송상현 교수의 정의, 평화 및 인권을 위한 업적과 철학을 이어받아 보다 나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2022년 1월 28일 발기인 모임을 기점으로 2022년 9월 2일 국회사무처로부터 설립 허가를 받은데 이어 2022년 9월 15일 법인 설립등기를 마치고 정식으로 재단법인으로 출범했다.

리걸타임즈 이은재 기자(eunjae@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