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8년간 토양 오염 조사하다가 췌장암 발병…산재"
[노동] "8년간 토양 오염 조사하다가 췌장암 발병…산재"
  • 기사출고 2022.05.0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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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행법] "발암물질에 지속적 노출"

8년간 토양 오염도 조사와 정화 등의 업무를 하다가 췌장암에 걸려 숨진 근로자가 소송을 통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았다. 서울행정법원 조국인 판사는 2월 11일 췌장암에 걸려 숨진 A(발병 당시 34세)씨의 부인과 두 자녀가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2020구단68380)에서 "요양불승인처분을 취소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오지은 변호사가 원고들을 대리했다.

2008년 5월부터 한 재단법인에서 근무하며 토양 오염도 조사와 정화 등의 업무를 담당한 A씨는, 2016년 4월 '췌장암, 간전이' 진단을 받고 근로복지공단에 이 상병에 대한 요양급여를 신청했으나, 근로복지공단이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의 심의 결과 등에 따라 '상병과 업무와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요양을 불승인하자 소송을 냈다. A씨가 소송 계속 중이던 2021년 7월 '췌장암에 의한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사망, A씨의 부인과 두 자녀가 소송절차를 이어받았다.

재단법인에서 토양기술팀 소속으로 근무한 A씨는 실외의 개방된 현장에서 육안, 후각 등으로 토양의 오염도 확인, 시료 채취와 검증 작업을 수행했으며, 오염된 토양에 포함된 유해물질로는 벤젠, 톨루엔, 에틸벤젠, 자일렌, TPH(석유계총탄화수소), 비소, 페놀 등이 있다. A씨는 등산복, 등산화, 라텍스 고무장갑, 안전모, 조끼 등을 착용하고 작업했다. 육감을 이용하여 토양의 오염도를 확인하므로 이를 착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해당 사업장의 실험실은 작업환경측정 대상이었으나, A씨가 담당한 부서는 작업환경측정 대상이 아니었다.

재판부는 먼저 대법원 판결(2016두1066, 2015두3867 등)을 인용, "산재보험법 제5조 제1호가 정하는 업무상의 사유에 따른 질병으로 인정하려면 업무와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하고 그 증명책임은 원칙적으로 근로자 측에 있다"며 "여기에서 말하는 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 · 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법적 · 규범적 관점에서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면 그 증명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또 "산업재해의 발생원인에 관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근로자의 취업 당시 건강상태, 질병의 원인, 작업장에 발병원인이 될 만한 물질이 있었는지 여부, 발병원인물질이 있는 작업장에서 근무한 기간 등의 여러 사정을 고려하여 경험칙과 사회 통념에 따라 합리적인 추론을 통하여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으며, 이때 업무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는 사회 평균인이 아니라 질병이 생긴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며 "근로자에게 발병한 질병이 첨단산업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의 이른바 '희귀질환'에 해당하고 그에 관한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발병원인으로 의심되는 요소들과 근로자의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현재의 의학과 자연과학 수준에서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희귀질환의 평균 발병률이나 연령별 평균 발병률보다 특정 산업 종사자 군이나 특정 사업장에서 그 질환의 발병률 또는 일정 연령대의 발병률이 높거나, 사업주의 협조 거부 또는 관련 행정청의 조사 거부나 지연 등으로 그 질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작업환경상 유해요소들의 종류와 노출 정도를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인정된다면, 이는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단계에서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할 수 있고, 나아가 작업환경에 여러 유해물질이나 유해요소가 존재하는 경우 개별 유해인자들이 특정 질환의 발병이나 악화에 복합적 · 누적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 사건 사업장에서 고인과 같은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직원들 중 췌장암이 발병한 사례는 없고, 췌장암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이 사건 화학물질(벤젠, 톨루엔, 에틸벤젠, 자일렌, TPH, 비소, 페놀 등의 화학물질)을 비롯한 발암물질이 '췌장암, 간전이'의 발생 내지 악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의학적으로 확립되어 있지는 않으나, 상병의 발병 · 악화와 고인의 업무 사이에는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봄이 타당하므로, 이와 다른 전제에 선 피고의 요양불승인처분은 위법하여 취소되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로, "고인은 이 사건 사업장에서 약 7년 11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오염된 토양을 손으로 만져 보고 냄새를 맡는 등으로 그 오염도를 검사하면서 이 사건 화학물질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발암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다"고 지적하고, "비록 고인이 실외의 개방된 현장에서 고무장갑 등을 착용하고 토양 오염도 조사 업무를 수행하였다고 하더라도, 육감을 이용하여 토양의 오염도를 확인하므로 고인은 많은 경우 고무장갑 등을 착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염된 토양을 직접 손으로 만지거나 냄새를 맡는 등으로 업무를 수행하였는바, 그 과정에서 이 사건 화학물질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발암물질에 장기간 지속적으로 노출됨으로써 건강상 장애를 초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또 "여러 유해인자에 복합적으로 노출되거나, 잦은 출장 등 근무조건의 유해요소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우 등에는 유해요소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질병 발생의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할 것인데, 고인은 2008년부터 2015년까지 적게는 연간 94일, 많게는 연간 172일에 달하는 출장 업무를 수행하였다"고 밝혔다. 출장 업무란 시료채취와 관련한 현장 출장을 말한다.

재판부는 "고인은 이 사건 사업장 입사 전에는 건강에 별다른 이상이 없었고, 췌장암과 관련된 가족력이나 유전적 소인도 없거나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 사건 사업장에서 8년 가까이 근무하던 중 우리나라의 평균 발병연령보다 훨씬 이른 시점인 만 34세에 췌장암이 발병하였다"며 "고인은 상병이 발생한 2016. 4. 6.로부터 약 4년 6개월 전인 2011. 10.경 이후 금연, 금주한 것으로 보이는 점을 비롯하여 앞서 본 고인의 업무내용 및 췌장암 발병 시기 등의 제반 사정을 종합하여 보면, 상병의 발생 내지 악화가 고인의 업무와 관계없이 오로지 고인의 개인적인 소인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