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타임즈 법조열전] 한국행정법학의 代父 김도창 박사
[리걸타임즈 법조열전] 한국행정법학의 代父 김도창 박사
  • 기사출고 2021.12.03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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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법 이론 토대 닦은 실천적 학자"

목촌(牧村) 김도창 박사(이하 '牧村'이라 함)는 1922년 임술년 음력 11월 19일 경북 안동 임하동에서 의성 김씨인 부친 김원익과 모친 권이녀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2005년 7월 17일 제헌절에 83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

안동에서 태어나 춘천공립중 졸업

그의 부친은 안동을 떠나 일본에서 상고를 졸업하고 수산업 등에 종사하기 위하여 牧村이 9살 되던 해에 강원도 주문진으로 이주했는데, 이러한 연고로 牧村은 1941년 춘천공립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강원도에서 생활하였다.

牧村은 일본 주오대학에 유학 중 학도병으로 입대한 후 일본이 패망하고 광복을 맞이하여 귀국하였다.

◇牧村 김도창 박사(사진 출처=법제처 발간 '법제'지 2005년 9월호)
◇牧村 김도창 박사(사진 출처=법제처 발간 '법제'지 2005년 9월호)

牧村은 1946년 서울대 법과대학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후 치른 제1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후에 법제처에 근무하면서 그곳에서의 학구적 분위기 속에서 공직과 학문을 병행할 수 있었다.

고등고시 사법과 1회 합격

牧村은 법제처에 근무하면서도 1954년부터 1957년까지 성균관대 법정대학 조교수로 겸직했고, 헌법과 행정법 강의를 담당했다. 변호사 활동을 한 기간인 1984년부터 1991년까지는 한양대 법과대학 대우교수로 재직했다.

牧村은 1953년 3월부터 1994년 10월까지 42년간 서울법대의 강단을 줄곧 지키며, 수다한 직업적 변천 속에서도 한국행정법학의 발전과 도약을 위한 학자적 열정을 품고 살았다.

牧村은 법률학 사전의 발간 등 공동연구와 협력작업에 각별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서울법대 유급조교로 활동하던 1949년 牧村은 김증한 교수, 유민상 선생과 함께 3인이 Jenks의 "Digest of English Civil Law(영국민법휘찬)"을 공동으로 번역하였다.

6.25 사변의 처절한 전란 속에서도 김증한 교수, 안이준 변호사와 3인 공동으로 우리나라 초유의 법률학 사전 편찬을 위한 편집 일을 주도하면서 200여명이 넘는 필자들과 공동으로 작업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964년에도 법문사 발행의 한국 유일의 법률학사전이 김증한 책임편집위원의 명의로 발간되었지만, 牧村이 국내 법학계를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교수와 실무가들이 공동집필하는데 총괄적 역할을 맡았다.

牧村은 1972년부터 1976년까지 약 5년에 걸쳐 행정판례의 조사와 편집작업을 사설 연구소인 한국행정과학연구소 이사장의 직에 있으면서 편집대표로서 최전선에서 진두지휘했다. 교수, 판사, 변호사 등의 공동의 협력작업의 산물인 총 4,792면 분량의 행정판례집 (상), (중), (하)를 발간했다. 이는 한국행정법학사에 있어서 행정판례를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정리한 금자탑과 같은 학술적 성과로 평가될 수 있다.

행정판례집 발간 진두지휘

이어 1980년에는 서울대 법학연구소 판례교재 시리즈의 일환으로 김도창, 서원우, 김철용, 최송화 교수 4인 공저의 판례교재 행정법을 법문사에서 발간하여 case method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였다. 牧村은 한사람보다는 다수가, 월요일보다는 수요일에 현명할 수 있다는 지론으로 협업을 통한 과제 수행에 남다른 역량을 발휘하였다.

牧村은 행정법학과 헌법학을 아우르면서 한국행정법학의 이론적 체계를 정립하고 방대한 연구성과를 집약했다. 이 땅에서 행정법학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머나먼 길을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김도창 행정법학은 학문적 출발점이자 넘어야 할 험준한 산이다.

牧村은 한국행정법학의 75년의 역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牧村은 한국공법학의 형성과 개척자로서 특히 황무지와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한국에 특유한 행정법의 이론적 기초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실천적 학자라고 할 것이다.

牧村은 체구가 단신이지만 다부지면서 잔잔한 미소를 띠는 온화한 성품으로 그의 인품에 매료된 것은 제자만이 아니라 학교와 지역을 넘어 다양한 교수와 실무가들에게까지 미친다.

牧村의 취미는 등산, 여행, 클래식 음악, 테니스, 당구, 골프, 바둑 등이다. 그의 천품은 치밀하면서도 단단한 내공이 있으며, '번지 없는 주막', '외로운 갑충' 그리고 '경건한 무녀' 등과 같은 압축적 은유를 사용하는 등 문학적 표현에 능숙하다. 법제처 등 공직생활 속에서도 원칙을 지키는 정통파 학자였다.

교육부차관, 법제처장 역임

牧村의 이력은 화려하다. 교수, 법제처 법제관, 법제국장, 보건복지부차관, 교육부차관, 국회의원, 한국공법학회 회장, 한국행정판례연구회 회장, 법제처장, 변호사, 한국법제연구원 이사장 등 다양한 경력을 거치면서도 화려한 활동 못지않게 한국법학과 공법학의 발전을 위하여 매우 의미 있는 활동을 많이 하였다.

牧村은 유급조교를 거쳐 시간강사나 대학의 전임교원으로 활동하는 동안은 물론이거니와 공직이나 변호사로 활동하면서도 연구활동이나 강의활동을 한 번도 중단한 적이 없을 만큼 학문에 대한 열정이 각별하였다.

저서 일반행정법론 유명

牧村은 법제처에 근무하면서도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함과 아울러 1956년 행정법각론, 1958년에 행정법론(상)이라고 하는 표준적인 행정법 교과서를 발간하고, 나중에 일반행정법론(상), (하)로 나눠 새로운 법령과 판례 및 최신의 국내외 이론을 담아 매년 개정판을 내는 등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자세를 몸소 보여주었다.

牧村은 한국의 대표적인 행정법학자로서 한국행정법학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태도로 부지런히 한국행정법학의 발전에 기여해 온 학자이다. 牧村은 부친이 훗날 학계에 진출하더라도 고등고시를 치를 것을 권유하여 대학원에서 번역작업을 하면서 이에 도전하여 1950년 상반기에 실시된 제1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게 되어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牧村은 그러나 고시 합격자가 통상적으로 진출하는 판사나 검사의 길로 나아가지 않았다. 초대 법제처장인 玄民 유진오 박사의 요청에 따라 법제처에 계속 근무하면서 학자의 길을 밟아가게 된 것은 한국행정법학계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玄民, "공리공론 배격" 평가

玄民은 牧村 화갑기념 논문집에 쓴 "김도창 박사와 나"라는 글에서, "牧村은 남다른 능력과 근면함에 더하여 천품의 치밀한 성격과 법제처에서의 다년간의 실무경험이 그의 학풍과 학자로서의 대성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牧村의 학풍은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실정법 질서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파악함을 위주로 하여 실무와 학문 양면에서 큰 공적을 이룬 학자이다"라고 평했다. 牧村이 학자의 길로 나아가는데 법제처는 자양분을 제공하였다.

牧村은 법제처의 주사, 사무관과 법제관 그리고 법제국장으로 활동하면서 법제처에서 1961년 8월까지 10여년간 봉직하였다. 牧村은 법제처의 법제업무를 통하여 터득한 실무적 역량으로 행정법각론을 먼저 출간하였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행정법총론을 내는 체계적 순서를 밟아가게 된다.

牧村은 1959년 법제처에 근무하면서 학문적 시야와 지평을 넓히기 위하여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에 6개월간 단기유학을 다녀왔고, 법제처장을 마친 후인 1981년 9월부터 12월까지 약 3개월간 독일의 본(Bonn) 대학에 체류하기도 하였다.

조지워싱턴대 유학

牧村은 건국 이후 학문이 일천하고 이론적 기초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행정관리의 경험을 가진 사람은 있어도 행정법학을 체계적으로 이론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태무한 상황에서 그 공백을 메꾸었을 뿐만 아니라 법제처에 근무하면서 치밀한 자세로 행정법의 이론적 기초를 형성할 수 있었다.

牧村이 수행한 일련의 공직과 사회활동 전반을 일괄해 본다면, 牧村은 해방 후 도약을 향하여 나아가던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 관료로 참여하건 상아탑에 머무르건 어느 자리에서건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이 나라에 정착시키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며 치열한 삶을 산 학자라고 할 수 있다.

牧村은 새로운 이론체계를 담고 있는 표준적인 행정법 교과서뿐만 아니라 주옥같은 논문의 발간과 공직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3차례 헌법개정 참여

牧村은 제3공화국 헌법심의위원회 자문위원, 1979년 정부 헌법개정심의위원회의 간사장 및 1987년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헌법개정안 기초소위원회 자문위원 등을 역임하며 3차례의 헌법개정에 참여하였다. 또한 법무부 행정심판법안 · 행정소송법안 심의위원회 위원장, 총무처 행정절차법 심의위원회 위원장의 활동을 맡는 등 국가의 공법 체계의 수립을 위해 다방면으로 활약한, 어두운 밤하늘에 떠 있는, 당대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빛나는 큰 별이었다. 牧村은 한국행정법학의 개척기에 새로운 길을 내고 그 길을 우보(牛步)처럼 뚜벅뚜벅 걸어갔으며, 한국행정법학계의 청사에 큰 발자취와 족적을 남겼다.

'번역법학 안주' 경계

牧村은 우리 법학이 '번지 없는 주막'처럼 번역법학에 안주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牧村은 우리 행정법학의 이론체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단계에서 외국이론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외국이론의 무조건 수입이라고 하는 번지 없는 주막도 아니고(weder), 외국이론의 무조건적인 거부반응은 우물안 개구리로 만들기 때문에 학문적 국수주의도 아닌(noch), 양자의 균형 있는 절충적 입장인 중도적 방법론으로, 심산의 호수와 같이 자기 스스로의 개성을 견지하면서 주위의 물줄기를 부단히 받아들이는 양전(兩全)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그리하여 외국법학의 수입이나 번역에 그칠 것이 아니라 한국에 유니크한 법체계를 창출하려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세계적 석학의 반열에 오른 牧村을 한국행정법학계의 대부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牧村은 행정법의 원로와 스승답게 학자의 역할과 자긍심을 고취하고 있다. 牧村은 그의 제자인 김철용, 박윤흔, 최송화 교수와의 고희 기념 대담에서 "학계야말로 진리 속에 스스로 파묻고 젊은 심령에 점화해 주는 지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직업이지요"라고 밝히고 있다. 교수들이 자신의 직업적 소중함을 망각하고 정치권에 기웃거리는 현상을 에둘러 비판한 것이다.

牧村은 본인의 화갑기념논문집의 명칭을 "현대공법의 이론"으로, 고희기념논문집은 "한국공법의 이론"으로, 팔순기념논문집의 명칭은 "한국공법 이론의 새로운 전개"로 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공법학의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화갑에 즈음한 1983년 牧村의 그동안의 학술적 연구성과를 모아 "공법이론"이라는 단행 논문집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론과 실무의 통합적 개척자'

2006년 7월 한국공법학회와 한국행정판례연구회가 공동개최한 牧村 1주기를 기념하는 학술행사에서 성낙인 교수가 "한국 공법학과 목촌 김도창-이론과 실무의 통합적 개척자"를 주제로 발표하고, 박정훈 교수는 독일의 오토 마이어(Otto Mayer), 김종철 교수는 영국의 알버트 다이시(Albert Diecy), 그리고 이광윤 교수가 프랑스의 모리스 오류(Maurice Hauriou)의 삶과 학문세계를 조명하였다. 牧村은 세계적으로 저명한 이들과 같은 반열의 공법학의 형성 ·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牧村은 대인의 풍모로 지연, 혈연 및 학연에 연연하지 않고 널리 개방적 · 대국적인 자세로 역량 있는 학자와 실무가들을 품었다. 牧村은 비록 행정규칙의 법규성의 문제를 놓고 牧村과 치열한 학술적 논쟁을 펼치고, 당시 통설적 입장을 견지하였던 牧村과 치열한 대립관계에 있던 김남진 교수를 배척하지 아니하였다. 牧村이 한국행정판례연구회를 설립하여 12년간 회장을 맡는 동안은 물론 牧村이 한국공법학회 회장으로 활동할 때에도 그를 연구이사로 포용한 점을 보면 牧村은 대덕을 갖춘 큰 도량의 학자라고 할 수 있다.

"화갑기념논문집은 학자의 특권"

둘째, 牧村은 행정법 분야에서 학자들의 화갑기념 논문집이나 정년기념 논문집에 명문의 하서(賀序 · 축하의 글)를 많이 남기었다. 이를 통하여 선비로서의 학자의 자세와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牧村은 관료와 법대교수를 거쳐 고위 공직자로 활동하였음에도 학자로서의 활동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남하 서원우 교수 화갑기념논문집(91. 11), 석천 허영민 교수 화갑기념논문집(93. 11), 균제 양승두 교수 화갑기념논문집(94, 12), 월산 최창호 교수 회갑기념논문집(95. 7), 현제 김영훈 교수 화갑기념논문집(95. 8), 남하 서원우 교수 정년기념논문집(97. 6), 정현 박윤흔 박사 화갑기념논문집(97. 6), 문연 김원주 박사 화갑기념논문집(99. 9), 정천 허영 박사 정년기념논문집(2002. 4), 청담 최송화 교수 화갑기념논문집(2002. 5) 등 10편의 기념논문집에 쓴 하서에 나타나 있다.

牧村은 1993년 11월에 쓴 석정 허영민 전북대 교수 화갑기념논문집 하서에서 "회갑을 기념하는 논문집을 증정하는 것은 어떤 자연인이 나이 먹었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뜻이 아니라 엄숙한 학계의 행사이며 학계와 관계가 없는 사람은 대통령이나 어느 그룹의 회장에게도 허용되지 않는 학자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특권은 '외로운 갑충'처럼 외곬으로 그리고 가난하게 학문의 길을 걸어 온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반대급부인 것이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셋째, 牧村은 미래세대의 공법학자 양성과 지역을 넘어 널리 인재를 양성하는데 관심이 많았다. 한국공법학회 회장으로 있을 때 학술장려상 제도를 마련, 신진기예에게 학술상을 수여하여 한국의 공법학을 짊어지고 나갈 미래세대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아울러 牧村은 지방의 학자를 배려하여 한국공법학회의 지역상임이사를 두었다.

'목촌법률상' 제정

牧村의 사후에는 김&홍 재단이 설립되어 '목촌법률상'이 제정되어 헌법과 행정법의 발전에 기여한 한국공법학회, 조규광, 김남진, 허영, 윤후정, 이상규, 최대권, 한국행정판례연구회, 김동희, 김철용, 성낙인, 김효전 등이 수상을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牧村은 법학은 사람을 길러내는 인간학이고, 상식을 가진 지도자를 연마시키는 지도자학인 동시에 사회의 미래상을 설계하는 미래학이라고 역설하였다. 선견지명을 갖고 이미 1980년대에 대학에서 법조인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미리 내다보았으며, 이처럼 법대 출신을 교육함에 있어 미시적인 법률기사를 길러낼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짊어질 지도자를 배출하여 법치가 정책의 뒷전으로 밀려나지 않고 법의 소양이 없는 사람들이 법치행정의 영역을 맡는 일이 없도록 대학교육과 국가인력정책의 정비를 촉구함과 아울러 법학을 전공한 우수한 두뇌집단이 행정부처의 변두리로 밀려나는 두뇌유출 경향을 걱정하기도 하였다.

학술적 인프라 구축 기여

그러면서도 牧村은 법률가는 시대 감각을 간직하여야 하고 사회변화의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牧村은 한국 행정법학의 선각자로서뿐만 아니라 국가지도자로서 미래를 내다보며 후학을 지속적으로 격려하고 비전을 제시하였다.

넷째, 牧村이 학술적 인프라를 구축하여 이론과 실무의 통합적 지혜를 교환하도록 한 공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실무가를 이론적 체계가 없다고 하고, 실무가들은 대학의 교수들이 현실을 잘 모르는 공리공론을 주장한다고 배척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牧村은 이론과 실무의 통합적 역량을 갖춘 선구자였다. 행정법의 세계에서는 교수와 실무가가 서로 존중하는 자세를 견지하며 다른 전공에 비하여 서로 배척하는 현상이 적은데,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牧村이 한국행정법학계의 중심적 역할을 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이론과 실무의 가교 역할

牧村은 관료 출신의 학자임에도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개인의 권리와 이익을 강조하고 법치주의의 후퇴를 경계하였다. 아울러 牧村은 법이론의 전개에 있어서 우리의 법적 문제와 외국의 법적 문제를 혼동하지 않았고, 특히 우리 헌법의 실정법적 해석을 중시하였다. 牧村은 법을 물처럼 이해하면서 한편에서는 어떤 본질을 추구하는 의연성과 다른 한편에서는 현실을 지도하는 유연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관점을 유지했다. 牧村은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이론과 실무의 가교 역할을 하였다. 牧村의 삶과 행적을 살펴보면 다년간의 공직생활 속에서 학자적 소신과 출처진퇴(出處進退)가 분명한 선비와 군자의 삶을 지향하였다.

제15회 한국법률문화상 수상

牧村은 1983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제15회 한국법률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이때 받은 상금의 일부를 행정판례연구회의 기금으로 희사하고 21인의 학자와 실무가가 뜻을 같이 하여 1984. 10. 29. 창립모임을 갖고 한국행정판례연구회가 발족되었다. 牧村이 그 자리에서 만장일치로 초대 회장으로 추대된 이래 1996년에 이르는 약 12년의 기간 동안 회장으로 재임하며 개방적 자세로 학회를 이끌었다. 牧村이 학계와 실무계의 활발한 학술적 논의 속에 행정법에 관한 이론과 실무가 조화되고, 행정법 판례의 건전한 비판과 검토를 통하여 우리 행정법학의 이론적 지평을 넓히는 학문적 소통의 플랫폼을 만든 것이다. 牧村의 혼이 담겨있는 그 학회는 현재까지 370회의 월례발표회를 이어가고 있다. 牧村은 한국행정법학계의 진정한 대부이다.

김용섭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kasan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