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 이 사람!] '국제중재 전문' 방준필 외국변호사
[법조 이 사람!] '국제중재 전문' 방준필 외국변호사
  • 기사출고 2021.10.05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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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이 뛰라고 하면 언제까지, 왜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뛰냐'고 답해야"

외국 기업의 한국 투자와 한국기업의 해외진출 등 국제화가 빠르게 진전되면서 한국 로펌에서 근무하는 미국변호사, 외국변호사 수도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수백명의 외국변호사가 한국 로펌에서 활동 중인 것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이들의 뛰어난 기여가 시장개방에도 불구하고 한국 로펌들이 외국 로펌의 공세를 막아내고 경쟁력을 높이는 비밀병기라는 고무적인 평가도 나오고 있다. 특히 국제중재 분야는 한국변호사든 외국변호사든 관할의 제한 없이 어느 국제중재기관의 케이스든 대리인이 되어 사건을 수행할 수 있는 분야여서, 영어 변론과 함께 외국변호사들이 한층 활약할 수 있는 한국 로펌의 주요 업무분야로 얘기된다. 리걸타임즈가 한국 로펌에서 활동하는 가장 성공한 외국변호사 중 한 명으로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법무법인 피터앤김의 방준필 미국변호사를 인터뷰했다.

◇방준필 외국변호사
◇방준필 외국변호사

방 변호사는 1997년 10월 법무법인 태평양에 입사, 한국 로펌 근무 24년이 흐른 시니어 외국변호사로, 그동안 그가 태평양과 피터앤김에서 수행한 국제중재 사건만 250건이 넘는, '한국 국제중재의 초석'을 놓은 변호사 중 한 명이다.

1년간 로클럭 근무 후 한국행

그는 템플대 로스쿨(Temple University School of Law) 졸업 후 곧바로 미 연방법원 판사 밑에서 1년간 로클럭(law clerk)으로 근무했지만 미국 로펌에 입사하는 대신 로스쿨 2학년 때인 1995년 여름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두 달간 인턴으로 근무한 것이 인연이 되어 98년 가을 태평양을 건넜다.

-미국변호사가 한국 로펌에서 이렇게 장수할 수 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20년 넘게 한국 로펌에서 성공적으로 활동하게 된 비결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외국변호사와 마찬가지로 나도 한국 로펌에 올 때 2년 계약으로 시작했다. 사실 24년 전 한국행 비행기를 탈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랜 기간 한국 로펌에서 근무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한국으로 오기 전 아버지께서 한국에 가거든 꼭 지켜야 한다며 당부하신 한국의 회사 문화에 대한 가르침이 한국 로펌에서 대과 없이 오래 근무할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버지께서는 '한국 들어가면 너는 제일 졸병이다. 항상 겸손하고, 모든 분들께 인사를 꼭 해야 하며, 인사를 할때는 90도로 머리를 숙여 정중하게 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또 맡은 업무를 열과 성의를 다하여 열심히 수행하고, 근무하는 회사에 충성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돈은 생각하지 말아라. 네가 열심히 하고 인정받으면 돈은 언제든 올 거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젊은 나이에 그 말씀이 그렇게 쉽게 와닿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지키려고 노력한 게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업무적으로는 태평양에서 좋은 선배들을 만나 변호사가 지녀야 할 여러 덕목을 배우고, 나름 열심히 노력해 국제중재 변호사로서 실력과 태도를 갖추게 된 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이민

방 변호사는 한국에서 태어나 다섯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고교를 수석 졸업하고, 아이비리그의 하나인 펜실베니아대(경제학 전공)와 템플대 로스쿨(JD)을 나왔다. 그는 지금도 미국에 살고 있는 부모님이 자신을 공부시키느라 정말 고생 많이 하셨다고 부모님 얘기를 많이 했다.

-미 법원에서 로클럭을 마친 변호사들은 대개 미국의 대형 로펌에 입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연방판사실에서의 로클럭 근무는 미 로스쿨 졸업생들 사이에 경쟁이 매우 치열하고, 서로 가고 싶어 하는 자리다. 또 로클럭을 하면 그 후 보통 미국의 대형 로펌에 들어가서 소송 일을 하는데, 사실은 법원에서 1년 정도 로클럭으로 일하면서 미국 소송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호사가 되어 법정에 나가 직접 변론하고 싶었는데, 미국 소송은 디스커버리(Discovery) 절차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서 큰 로펌에 들어가면 거의 5년 동안은 서류 보는 일만 해야 한다. 태평양에서 인턴 할 때 국제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당시에는 태평양이 국내 소송을 많이 했지만 앞으로 국제적인 거래, 분쟁 관련 일을 많이 할 거라고 해서 나중에 변호사가 되어 오고 싶었던 로펌이다. 그래서 로클럭을 마친 후 곧바로 태평양행을 결심했다."

-태평양 입사 초기 주로 어떤 일을 했나.

4~5개 포지션 맡아 활약

"처음 태평양에 왔을 때 국제중재나 국제소송 사건은 별로 없었다. 97년 가을엔 한국어를 좀 더 익히려고 어학당을 다니며 파트타임으로 일하다가 98년 1월 1일부터 풀타임으로 근무했는데, IMF 외환위기가 터져 M&A, 구조조정 등에 관련된 일이 엄청나게 쏟아질 때라 M&A 자문, 라이선싱이나 디스트리뷰터십 계약 등 소프트 IP 업무, 항공과 해상 관련 자문 등 트랜스액션(transaction) 일을 많이 했다. 당시 태평양에 외국변호사가 나를 포함해 4~5명밖에 안 되던 시절이라 외국변호사의 도움이 필요한 업무에 단골로 불려 다녔다. 야구로 치면 내 포지션이 4~5개쯤 되었다.

◇법무법인 피터앤김의 방준필 외국변호사가 리걸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국제중재시장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법무법인 피터앤김의 방준필 외국변호사가 리걸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국제중재시장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시기적으로 변호사를 시작한 시기에 IMF 외환위기가 터져 이로 인한 로펌 특수의 덕을 많이 본 것 같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97년 가을 IMF 외환위기가 본격 시작되기 전에 한국에 왔는데, 갑자기 IMF 사태가 터져 걱정했던게 사실이다. 기업들이 연쇄 도산하고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등 한국사회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며 '미국의 큰 로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한국에 잘못온 거 아닌가'라고 후회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두어 달 지나자 로펌에 일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거의 매일 밤을 새며 일했던 기억이 난다. 파트너 변호사들이 한 달에 200시간, 300시간씩 일했던 시절이다.

개인적으로는 1999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ICC 중재사건이 들어와 태평양의 변호사들과 함께 수행하는 등 처음 5년간 다른 어느 로펌의 어떤 변호사들보다도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M&A 딜에서의 네고(negotiation)나 국제중재에서의 변론 같은 일은 상당한 경험을 쌓은, 최소한 시니어 어소나 주니어 파트너쯤은 되어야 주어지는 일이다. 태평양에서 변호사 초년병 시절에 다양하게 업무를 익히며 값진 경험을 했다. 'I was thrown in the deep end of the pool'이라는 미국 속담이 있는데, 수영도 잘 못 하면서 깊은 수영장에 던져졌으나 업무를 배워가며 잘 헤쳐 나온 셈이다."

방 변호사는 이때 수행한 M&A딜 중 하나로 현대중공업 등 현대 계열사가 IMF 위기를 맞아 1999년에 현대오일뱅크 지분 50%를 아부다비 국영석유투자회사(IPIC)에 매각한 거래를 소개했다. 이 거래에서 현대 측에 자문한 방 변호사팀은 나중에 지분이 70%까지 늘어난 IPIC가 주주간 협약을 어기고 현대가 아닌 다른 곳에 현대오일뱅크 주식을 매각하려 하자 현대 측을 대리해 IPIC를 상대로 ICC에 중재를 제기해 100% 완승을 거두었다. 방 변호사는 또 코엑스가 처음 만들어질 때 동양제과를 대리해 일본의 소니와 함께 조성한 영화관 메가박스 코엑스의 탄생에도 기여했다.

메가박스 코엑스 탄생에 기여

-국제중재 업무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수행했나.

"1999년에 수행한 ETRI 사건이 첫 국제중재 사건이다. 2000년 독일의 지붕 시공회사인 멤브레인(Membrane)이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의 지붕 시공과 관련해 한국의 대형 건설사를 상대로 제기한 ICC 중재에서도 한국 건설사를 대리해 신청인 측 청구를 막아내는 승소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국제중재 업무를 수행하게 된 건 2002년 김갑유 변호사와 함께 한국 로펌 최초로 태평양에 국제중재팀을 창설한 이후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태평양이 국제중재팀을 창설한 2002년만 해도 한국의 국제중재시장이 아직 본격 성숙하기 전이다. 그런 점에서 방 변호사 등 태평양 국제중재팀의 결단은 일종의 퍼스트 무버의 그것으로 이해된다.

"나는 사실 태평양에서 2002년에 국제중재팀을 만들 때 적극적인 입장이 아니었다. 국제중재를 수행해 본 경험도 많지 않은데다 M&A 딜이나 IP 자문 등 이런저런 업무로 잘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담팀을 만들어 어떻게 할 거냐 하는 고민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냥 다른 일을 하면서 중재사건도 하면 되지, 왜 국제중재팀을 만들어 그것만 하겠다고 하는 건지 좀 궁금했다.

그런데 김갑유 변호사의 비전이 빛을 발했다. 김 변호사는 한국 클라이언트를 잘 이해할 수 있는 한국변호사와 외국 재판 경험이 있는 한국계 외국변호사의 조합이 한국기업의 요구를 잘 파악하여 대처할 수 있어 외국의 대형 로펌들에 비해 경쟁력을 가질 수 있고 시너지도 클 것이라며 나를 설득했다. '우리가 하면 외국 로펌들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그렇게 얘기해서 시작하게 되었는데, 김 변호사의 판단이 정확히 들어맞았다.

IMF 이후 포스트 M&A 분쟁 등 국제중재 사건이 밀려들어왔다. 특히 초기 5년 동안 10년의 경험치와 맞먹을 정도의 많은 사건을 수행하며 경험을 쌓게 되었고, 이것이 태평양 국제중재팀의 성공에 큰 발판이 되었다. 당시 수행한 사건들은 중도에 합의로 끝나지 않고 판결까지 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승소 판정을 많이 받았다. 국제중재팀 창설의 효과를 빨리 본 셈이다."

M&A 딜 경험, 국제중재 수행에 도움

방 변호사는 "그 전에 M&A 딜 등 다양한 거래에 참여해 쌓은 경험이 국제중재를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직접 계약서를 만들고 협상을 해 보았기 때문에 왜 이런 조항이 들어가게 되었는지 중재판정부 앞에서 훨씬 수월하게 계약 내용을 설명할 수 있었다고 했다. 또 미국에 있을 때 로클럭으로 근무하며 익힌 미국 법원의 송무 현실에 대한 이해도 국제중재 수행에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미국 법원에서 로클럭으로 경험을 쌓은 후 곧바로 한국으로 날아와 IMF 특수에 따른 다양한 거래를 수행하고, 국제중재팀을 만들어 국제중재 변호사로 성공한 방 변호사의 지난 24년을 돌아보면 그의 변호사로서의 삶은 이미 성공이 예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2003년 해외에서 열린 국제중재 컨퍼런스에 김갑유 변호사와 함께 참석했는데, 국제중재 주요 인사 중에 저희를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그때 반드시 성공하여 국제중재시장에서 주류로 인정받겠다고 다짐하고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5년 후 열린 또 다른 국제중재 컨퍼런스에서는 5년 전에는 인사조차 나누지 못했던 해외 유명 로펌의 국제중재 변호사들이 먼저 저희를 찾아와 명함을 건네고 미팅을 갖자고 요청할 때 정말 감격스러웠지요. '우리가 해냈다'는 자랑스러움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아태 '분쟁해결 변호사' 선정

방 변호사 개인적으로도, 국제중재를 시작한지 6년만인 2008년에 처음으로 Who's Who Legal에 국제중재 전문가로 등재되는 등 국제중재 분야에 특화한 것이 의미가 작지 않았다. 방 변호사는 2016년 법률잡지 아시아로(Asialaw)로부터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분쟁해결 변호사' 상을 받은 데 이어 2019년 ALB가 주관한 'ALB Korea Law Awards 2019'에서 '올해의 분쟁해결 로이어(Dispute Resolution Lawyer of the Year)'로 선정되는 등 전문가 집단의 평가에서도 최고 수준의 평가를 이어가고 있다.

◇방준필 외국변호사
◇방준필 외국변호사

국제중재 변호사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은 방 변호사는 태평양에서도 외국변호사 처음으로 국제중재팀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에서 활동하는 많은 외국변호사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방 변호사는 "김갑유 변호사는 태평양의 국제분쟁그룹 전체를 총괄하고, 국제중재팀은 내가 맡아 이끌었다"며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는 많은 외국변호사들로부터 네가 테이프를 끊었으니 우리도 열심히 하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많은 축하를 받았다"고 고무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동안 250건이 넘는 국제중재 케이스를 다룬 것으로 알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어느 사건인가.

"역시 첫 사건이었던 ETRI가 공동 개발한 CDMA 기술의 로열티 배분을 놓고 퀄컴과 맞붙었던 ICC 중재 사건이다. 미국의 거대 기업과 한국 국가연구소의 싸움은 무모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TDMA가 표준화되어 있던 디지털 이동통신시장에서 미래를 내다보고 CDMA 기술을 선택하여 세계 최초 상용화를 성공시킨 ETRI의 입장에선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사건이었기에 합의 제안도 거부하고 끝까지 싸워 결국 승소했다. 정보통신 분야의 오양호 변호사와 IP 전문의, 지금은 고인이 된 황보영 변호사 등과 함께 사건을 수행, 퀄컴으로부터 5억 달러 이상을 받아냈다. 이 사건은 특히 태평양에 국제중재팀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 사건이어 의미가 더욱 각별한 사건이기도 했다.

ETRI 사건 계기 국제중재팀 창설

또 하나를 뽑는다면 태평양이 2011년에 처음으로 'GAR 30'에 이름을 올리고 GAR로부터 '그해 최고의 승소판정(Win of the Year)' 상을 받은 현대오일뱅크 국제중재 사건이다. 현대중공업을 대리한 태평양 국제중재팀은 ICC 국제중재재판소 중재판정부로부터 "IPIC가 보유한 현대오일뱅크 주식 70% 전량을 시세보다 25% 싼 가격에 현대중공업 등 현대 계열사에 매각하라"는 판정과 함께 변호사비용을 포함한 중재비용까지 전액 IPIC가 부담하라는 완벽한 승소판정을 받았다. 현대중공업이 거둔 경제적 이득이 약 4조원 가까이 되는 잭팟이었다."

태평양 국제중재팀의 두 주역이자 한국 국제중재계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는 김갑유 변호사와 방준필 외국변호사는 현재 국제중재와 국제소송 등 국제분쟁 사건만 전담 수행하는 법무법인 피터앤김에서 활동하고 있다. 김갑유 변호사와 함께 '국제분쟁 전문 로펌'을 띄운 것으로, 방 변호사는 "몇 년 전부터 세계 법률시장에 한 가지 분야에 특화된 전문 부티크 로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며 "전문 로펌들은 각 분야의 실력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 발빠르게 움직이며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기에 효율적으로 사건에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이 아주 매력적"이라고 소개했다. 또 "피터앤김은 일반 계약 자문이나 노동법 자문 등 분쟁해결 외 다른 사건은 일체 하지 않기 때문에 컨플릭트의 우려 없이 어느 당사자나 대리할 수 있는 이른바 '컨플릭트 프리(Conflicts-free)' 로펌이어서 더욱 발전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하고, "전에 태평양에 있을 땐 고객들이 사건을 가지고 찾아와 맡아 달라고 요청하는데도 컨플릭트 때문에 수행하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다"고 덧붙였다. 김갑유 변호사가 2020년 초 피터앤김을 설립하고, 그로부터 1년 지나 올 초 합류한 방 변호사는 "부티크 로펌인 피터앤김에서 좀 더 특화되고 컨플릭트에서 자유롭게 다양한 일들을 해보고 싶었다"고 합류 동기를 설명했다.

론스타 ISDS에서 한국 정부에 자문

올해 안으로 판정이 날 것으로 예상되는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투자자중재(ISDS)에서 한국 정부에 자문하는 등 수많은 국제중재와 ISDS 사건을 수행해온 방준필 변호사는 현재 맡고 있는 국제중재 케이스로, 송도 국제도시 개발과 관련해 빚어진 포스코건설과 게일 인베스트먼트와의 수조원대 국제중재 사건을 먼저 들었다. 올 연말 중재 심리기일이 열릴 예정인 이 사건에서 피터앤김은 포스코건설을 대리하고 있다. 방 변호사팀은 또 올 초 미국의 대형 바이오 테크놀로지 회사가 한국의 유명 바이오 테크놀로지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ICC 런던중재사건에서 신청인 측 대리인으로 선임되어 사건을 수행 중에 있다. 한국기업 등이 관련된 주요 국제중재 분쟁에 방 변호사팀이 빠지지 않고 관여한다고 하면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외국의 대형 로펌도 한국에 진출하여 국제중재 분야를 전문으로 다루는 등 한국기업 등이 관련된 국제중재 사건이 계속해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건설 분쟁 등 증가 예상

국제중재 전문인 방 변호사는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로, "한국기업들이 해외에 많은 거점을 확보하고 다양한 국제상사 계약에 나서고 있으며, 한국기업들이 체결하는 많은 계약에 국제중재로 분쟁을 해결한다는 분쟁해결 조항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가 앞으로 국제중재 분쟁이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하는 산업 분야는 건설(construction) 분야. 그리고 생명과학과 바이오테크, 제약 업종에서의 라이선싱 및 디스티리뷰터십 계약 관련 분쟁, 합작투자와 M&A 관련 분쟁을 꼽았다. 이와 함께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투자자중재와 한국의 투자자들이 해외 투자처에서 겪는 분쟁과 관련해서도 외국 정부를 상대로 ISDS가 꾸준히 제기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20년간 국제중재 한 우물을 파온 '성공한 국제중재 변호사' 방준필 변호사는 태평양에 있을 때 신입 변호사들에 대한 강의를 여러 해 동안 진행했다고 한다. 후배들이 '어떻게 성공했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그가 가장 강조하는 첫 번째 대답은, 방 변호사 자신이 20년 전 지금은 태평양의 대표변호사로 있는 오양호 변호사로부터 배웠다는 서비스 마인드. 방 변호사는 "변호사일은 고객이 제일인 서비스 산업"이라며 "변호사는 고객이 뛰라고 하면 '언제까지' 또는 '왜 뜁니까'라고 되물을 게 아니라 '얼마나 빨리 뛰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답을 해야 한다"고 후배들에게 당부했다.

"눈치 있어야"

또 하나는 건강한 체력과 함께 '겸손', '성실'해야 함은 물론 '눈치'를 기르라는 것. 그는 "눈치가 없어도 열심히 일하면 돈은 벌 수 있지만, 성공은 못 한다"며 "사람도 사귀고 클라이언트 베이스도 있어야 하는데 눈치가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다 보면 운이 따르게 될 것이고, 자연히 국제중재 변호사로 성공하게 될 거라고 했다.

◇방준필 외국변호사
◇방준필 외국변호사

상대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환한 얼굴에 명쾌한 의사 표명이 돋보이는 그가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도 '마음의 평화'. 그는 "개인 일이든 회사일이든 평화가 없으면 집중이 안 된다"며 "나는 행복은 몰라도 평화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분쟁해결 전문가다운 철학이다.

애주가이면서 틈만 나면 골프장을 찾는 주말골퍼인 그는 주위에서 한국에서 줄곧 생활한 토종 한국인보다도 더 한국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고 한다. 결혼도 태평양에 입사한 이듬해인 99년 봄 한국에서 만난 부인과 일찌감치 가정을 꾸려 두 딸을 두고 있다.

올해로 만 50세가 된 그의 소망은 평생의 멘토가 된 김갑유 변호사와 함께 피터앤김을 세계적인 로펌으로 발전시키고 함께 은퇴하는 것. 방 변호사는 "출범 1년 만에 'GAR 30'에 진입한 피터앤김에서 국제중재 변호사로서 인생 후반부를 빛내고 싶다"고 높은 기대를 나타냈다.

리걸타임즈 김진원 기자(jwkim@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