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타임즈 법조열전] 하이브리드형 법률가 로스코 파운드
[리걸타임즈 법조열전] 하이브리드형 법률가 로스코 파운드
  • 기사출고 2021.10.0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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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engineer가 법률가의 역할"

미 네브라스카주의 링컨시 출신으로 법학사의 학위조차 없이 하버드 로스쿨 교수가 되어 하버드 로스쿨 학장으로 20년간 봉직하면서 세계적인 법학자의 반열에 오른 로스코 파운드(Roscoe Pound,1870-1964)는 법률가인 스테판 파운드(Stephan Bosworth Pound)와 독일어와 식물학 전공의 교사 로라 비델컴(Laura Biddlecome) 사이에서 3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식물학을 전공하고 하버드 로스쿨에서 1년간 수학 · 중퇴한 후 독학으로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 로스쿨 교수, 로스쿨 학장, 법학자 등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33세의 나이에 네브라스카 법대 학장을 지냈을 뿐만 아니라 하버드 법대에서 20년간 학장을 지내 그를 'Dean Pound'라고도 칭한다.

◇하버드 로스쿨 학장 시절의 로스코 파운드(하버드 로스쿨 홈페이지 사진 캡처)
◇하버드 로스쿨 학장 시절의 로스코 파운드(하버드 로스쿨 홈페이지 사진 캡처)

그는 미국의 사회학적 법학(Sociological Jurisprudence)을 체계적인 형태로 발전시킨 가장 영향력 있는 법률가 중의 한 사람으로, 20세기 미국 법학계의 거장(巨匠)이자 하이브리드(hybrid)형 법률가로 평가된다.

아버지는 판사 출신 변호사

파운드의 아버지는 네브라스카 링컨시에서 12년간 판사로 활동하였고, 링컨시 초대 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공화당 소속 주 상원의원으로 활동한 그의 아버지는 아들인 파운드에게 법학을 공부해 볼 것을 권유하여 먼저 법학서적을 읽도록 하고, 네브라스카에는 당시 로스쿨이 없어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하기를 희망하였다. 파운드는 부친의 기대에 부응하여 크리스토퍼 랑델이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하버드 로스쿨에 1년을 다녔으나, 법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학교 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아 중퇴하고 네브라스카로 돌아온 그는 그러나 독학으로 법학 공부를 하여 치른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였다. 파운드는 부친의 법률사무소에서 합동으로 변호사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전직 교사로 식물학과 독일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파운드는 어머니를 통하여 영어보다 독일어를 일찍 배울 수 있었는데, 네브라스카주의 공교육 시스템이 좋지 않아 정규 학교를 진학하지 않고 12세까지 부모의 가학(家學)을 통해 기초를 탄탄히 하였던 셈이다. 파운드가 네브라스카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정규학교를 다니지 않으면서 수업한 내용은 그리스와 라틴 고전, 암기력, 독문학, 식물과 곤충에 관한 지식 등이었다. 네브라스카의 저명한 사람들이었던 그의 부모는 의심할 나위 없이 파운드의 지적인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독학으로 변호사시험 합격

파운드는 비범한 능력의 소지자로 14세에 네브라스카 대학에 입학이 허가되었다. 그는 1년간 병으로 휴학하였음에도 1888년에 문학과 식물학을 복수 전공하여 18세에 우등으로 학사과정을 졸업하였다. 그는 1년 후인 1889년에 식물학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식물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했으나, 1년 만에 중도하차한 후 1890년에 네브라스카에 돌아와 네브라스카 대학의 식물학 박사과정에 등록하였다. 그 후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활동에 주력하면서 네브라스카 대학의 식물학 박사과정을 밟은 그는 1897년에 "네브라스카주의 식물지리학"이라는 논문으로 식물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파운드가 대학입학 후 15년이 넘는 기간 식물학 연구에 몰두하였음에도 법학자로 전환하여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오른 것은 매우 불가사의한 일에 속한다.

파운드는 식물학을 통해 형성된 생태학적 관점에 기반하여 기존의 법개념과는 다른 사회학적 법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식물이 토양과 기후 등으로부터 영향을 받듯이 인간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파운드는 1899년에는 네브라스카 대학의 법률학 조교수로 임용되어 법학을 가르쳤다. 그는 1901년에서 1903년까지 네브라스카주 최고법원 상소위원(판사)을 역임했고, 1903년에 네브라스카 로스쿨의 학장에 취임하여 미국 유수의 법과대학의 하나로 육성, 발전시켰다.

ABA 연차대회 연설 유명

그러나 그가 법률가로 성공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 중 하나는 37세의 나이로 네브라스카 법대 학장으로 있던 1906년 미국변호사협회(ABA) 연차대회에서 행한 "사법행정에 대한 국민의 불만의 원인(The Causes of Popular Dissatisfaction with the Administration of Justice)"이라는 제목의 연설이다. 당시 변호사대회에선 큰 비판에 직면하여 파운드에게 반박할 기회조차 부여되지 않았으나, 나중에 변호사단체와 학계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파운드의 논문이 주목을 받았다.

이 논문과 연설의 영향으로 노스웨스턴 대학 법대 교수로 초빙되어 법철학과 로마법을 강의하고, 2년간 노스웨스턴 법대를 거쳐 시카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시카고 대학에서 1년간 근무한 후 그의 논문을 주목한 하버드 로스쿨 학장의 초빙으로 하버드 로스쿨의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하버드 로스쿨 1년 중퇴생으로 법학사가 아니면서 하버드 로스쿨의 교수가 된 것이다.

파운드는 1916년에 하버드 로스쿨 학장으로 임명되어 1936년까지 20년동안 재직하면서 하버드 로스쿨을 세계적인 로스쿨로 만들었다. 로스쿨 안에 대학원 과정을 설치하여 법학교수를 양성하였고, 아울러 세계 최대의 장서를 자랑하는 법대 도서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파운드는 신입생의 등록이 거의 2배로 늘어나게 되자 학사기준을 엄격히 강화하여 학생의 3분의 2만이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여러 뉴딜 조치 지지

하버드 졸업생 중 뉴딜 정책에 핵심적 역할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파운드는 비록 공화당원이었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의 여러 뉴딜 조치를 지지하기도 하였다. 파운드는 1936년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Alfred M.Landon을 지원하기 위하여 하버드 로스쿨 학장직을 내 놓았다. 그러나 그는 그 다음해에 하버드 로스쿨을 벗어나 하버드 대학의 어느 단과대학에서도 강의할 수 있는 지위를 얻었다. 파운드는 하버드 대학에서 11년간 다양한 분야의 강의를 하면서 1947년까지 교수로 봉직했다.

파운드는 "보통법의 정신(The spirit of the common Law, 1921)", "법철학입문(An Introduction to the Phylosophy, 1922)", "법률사관(Interpretation of Legal History, 1923)", "법의 임무(The Task of Law, 1944)"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 중 일부 저서와 논문을 서울대 법대 학장과 경희대 총장을 지낸 고병국 교수가 1950~60년대에 국내에 번역 · 소개하기도 하였다.

파운드는 자신의 저서인 "법률사관"에서 "법은 안정되어야 하나, 그렇다고 정지될 수 없다"고 하여 법적 안정성과 변화가능성을 함께 강조하였다.

법학에 관한 방대한 연구성과를 축적한 그는 하버드 로스쿨은 물론 미국의 법학계를 넘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1946년 중국의 장개석이 중국의 사법시스템을 재조직하기 위하여 파운드를 국민당 정부의 법무부 고문관으로 초청하였다. 중국 남경에서 행한 그의 강연 "Comparative law and history as bases for Chinese law(중국법의 기초로서의 비교법과 법제사)"를 김증한 교수가 번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49년 모택동의 공산주의 정권이 등장하여 중국의 고문관으로서의 입법 참가작업은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는 하버드 로스쿨을 잠시 떠나 새롭게 로스쿨로 출범하게 되는 UCLA에서 1949년에서 1953년까지 교수로 활동하였고, 그 후 하버드 로스쿨로 다시 돌아와 1964년 타계할 때까지 집과 연구실을 걸어서 다니며 논문과 저서 등의 집필활동을 계속하였다.

결강 메우는 법학의 전천후 요격기

파운드는 안경을 써야 할 정도로 책을 많이 읽어 시력은 비록 좋지 않았지만 하루에 16시간씩 연구에 몰두하고 영하 10도의 추위에도 외투를 걸치지 않는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20년에 걸치는 하버드 로스쿨 학장 근무기간 동안 평생의 조력자인 직원 Miss McCarthy와 2인이 모든 행정을 책임지고, 다른 교수에게 학사행정을 위임하지 않고 직접 일처리를 하였다. 교수가 로스쿨 강의를 결강하게 된 경우에는 학장인 파운드가 해당 교수를 대신하여 직접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는 법학 분야의 모든 과목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학생들에게 강의할 수 있는 전천후 요격기였다.

그는 올리버 웬델 홈즈 대법관의 실용주의적 관점을 공유했으며, 1931년 61세의 학계 원로였던 파운드가 37세의 소장파인 르웰린과 24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법현실주의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파운드의 사회학적 법학과 르웰린의 법현실주의적 관점은 실상 프라그마티즘 철학의 토대 위에서 형식논리를 벗어나 법을 사회적 도구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는데, 이러한 학술적 논쟁은 미국의 법현실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워렌 대법원장이 헌사

파운드는 1950년 런던에서 개최된 국제비교법학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파운드는 그해 4월 24일부터 26일까지 자신의 모교인 네브라스카 대학에서 특별강연을 했는데, 이 강연 내용을 모은 책이 "법의 새로운 길(New Paths of the Law, 1950)"이다. 1947년엔 그의 75주년 생일을 축하하는 세계의 저명한 학자들이 기고한 기념논문집, "근대법철학논집(Interpretation of Modern Legal Phylosophy)"이 출간되었다. 1962년 10월 27일 92세 생일에는 미 연방대법원장인 Earl Warren이 명예편집장이 되어 저명학자들이 집필한 "법철학논집(Essays in Jurisprudence in Honor of Roscoe Pound)"이 헌정되었다. 당시 워렌 대법원장은 "그의 법에 대한 헌신, 그의 법원과 변호사의 구성원의 교육에 대한 공헌 그리고 미국 법학에 대한 위대한 공헌은 역사 속에서 추방되지 않고 계속 존재하고 있다"라고 헌사를 하였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일과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그럼에도 친구들과 언제든지 즐겁고 항상 시간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불어, 독어, 스페인어,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에 능통하였고, 러시아어에 대한 약간의 지식과 함께 76세의 나이에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별세할 때까지 하버드 로스쿨의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글을 쓰면서 학자의 삶을 다하였다.

그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일요학교에서 성경의 구절을 거의 암송할 정도였다. 젊은 시절부터 달리기를 잘했고 50이 넘어서도 5분 내에 1마일을 달릴 수 있을 정도로 스포츠를 좋아했다.

황금시대로 불리는 20년간 하버드 로스쿨의 학장을 역임하고, 세계적인 법학자이자 법률가, 교육자, 행정가로 자리매김했지만, 파운드는 법학 분야에선 학위를 받은 게 전혀 없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사회학적 법학의 창시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사회적 이익개념을 발전시켜 미국 연방최고법원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파운드는 사람들이 충족하고자 하는 요구, 욕망, 기대를 이익으로 보고, 이를 발견하여 승인함으로써 개인, 단체, 사회가 갖고 있는 이익간의 대립을 해소하는 것이 법의 주요한 기능이라고 생각했다.

파운드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법은 법규정과 전통뿐만 아니라 제반 조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법은 유연하게 사회 변화의 요구에 적응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의 이론은 미국에서 법현실주의 학파의 등장에 영향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뉴딜정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법률가는 광범위하게 알아야

파운드는 법률가는 사회의 효율적 구조를 설정하는 사회기술자(social engineer)가 되어야 한다고 하고, 법률가는 편협하게 법학적 지식에 편중된 식견을 넘어 광범위한 분야 즉, 다양한 주제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파운드는 식물학에서 터득한 생태학적 방법론을 법학에 접목하여 기존의 자연법론, 분석법학 및 역사법학이 생태학적 관점이 결여된 것을 간취하고 새로운 사회학적 법학의 세계를 열었다. 그는 법을, 정치적으로 조직된 사회의 힘을 체계적으로 창조하고 여러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사회통제의 장치로 파악함과 동시에 사회 재건의 유효한 수단으로 보았다.

소크라테스식 강의법 채택 안 해

파운드는 로스쿨의 본고장인 하버드 로스쿨에서 소크라테스 문답식 강의법을 적용하지 않고 일방적 강의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여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얻기도 하였다. 그는 법학은 다른 학문적 배경을 기반으로 기본적으로 독학의 방식으로 자학자습이 가능하며, 훌륭한 법률가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파운드가 별세하자 1964년 7월 2일자 뉴욕타임즈는 "하버드의 로스코 파운드 별세; 20년간 하버드 로스쿨 수장 역임, 그의 사회적 이익이론은 뉴딜에 영향을 미쳤다-다양한 분야의 학자이다"라고 타이틀을 뽑고 장문의 부음기사를 실었다.

파운드는 하버드 대학 졸업생도 아니고 법학사 학위조차 없었지만 20년간 학장을 맡아 하버드 로스쿨을 세계 최고의 로스쿨로 발전시키고 법사회학과 법철학 연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능력을 중시하는 실용적 미국 사회에서 꽃 핀 하이브리드형 법률가의 전형이다.

◇로스코 파운드의 법사상=파운드는 법을 유연한 것으로 보고, 사회변화의 요구에 적응하여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으나, 뉴딜정책에 따라 행정기구가 강력한 힘을 가져 권한을 남용하는 것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또한 법원이나 행정기구가 입법적 기능을 침해하려는 모든 경향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그는 복지국가나 독재 국가적 경향에 반대하고 이에 비판하는 입장을 견지하였으며, 미국이 사법체계의 독립성을 강화할 것을 주문하였다.

미 사회학적 법학의 아버지

그는 사회는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법은 개인과 사회의 요구에 지속적으로 적응하고 재적응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법사회학과 법철학에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미국의 사회학적 법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김용섭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kasan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