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어려운 사정 알고 돈 빌려줬으면 못 받아도 사기 아니야"
[형사] "어려운 사정 알고 돈 빌려줬으면 못 받아도 사기 아니야"
  • 기사출고 2021.09.28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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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기망 아니야…민사상 채무불이행 불과"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고 돈을 빌려줬다면 나중에 돈을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사기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속인 것으로 볼 수 없어 사기죄가 성립하지는 않는다는 취지다.

대법원 제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8월 26일 평소 알고 지낸 B씨에게서 2,000만원을 빌렸으나 돈을 갚지 못해 사기 혐의로 기소된 A씨에 대한 상고심(2021도7942)에서 이같이 판시, 벌금 5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의정부지법으로 되돌려보냈다.

A씨는 2015년 2월 1일경 B씨에게 전화를 걸어 "돈을 융통할 곳이 없는데, 2,000만원만 빌려주면 한 달 뒤인 2월 말까지 갚겠다"며 2,000만원를 빌렸으나 2017년 4월 B씨로부터 변제독축을 받고도 갚지 못했다. 이에 검사가 A씨가 당시 별다른 재산도 없는데다가 약 2억 700만원 상당의 채무가 있어 차용금을 변제할 의사나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B씨에게 돈을 편취했다고 보고 A씨를 사기 혐의로 기소, 1심과 항소심 재판부가 모두 사기 혐의를 인정해 벌금 500만원을 선고하자 A씨가 상고했다. A씨는 방송국에서 과장으로 일하면서 2014년에 연봉 7,550만원, 2015년에 6,940만원가량의 소득이 있었으나, B씨로부터 돈을 빌릴 당시 2억 700여만원의 채무를 부담하고 있었다.

대법원은 그러나 다르게 판단했다. 

대법원은 먼저 종전의 대법원 판결(2012도14516 등)을 인용, "사기죄가 성립하는지는 행위 당시를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하므로, 소비대차 거래에서 차주가 돈을 빌릴 당시에는 변제할 의사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비록 그 후에 변제하지 않고 있더라도 이는 민사상 채무불이행에 불과하며 형사상 사기죄가 성립하지는 아니한다"고 전제하고, "따라서 소비대차 거래에서, 대주와 차주 사이의 친척 · 친지와 같은 인적 관계 및 계속적인 거래 관계 등에 의하여 대주가 차주의 신용 상태를 인식하고 있어 장래의 변제 지체 또는 변제불능에 대한 위험을 예상하고 있었거나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경우에는, 차주가 차용 당시 구체적인 변제의사, 변제능력, 차용 조건 등과 관련하여 소비대차 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사항에 관하여 허위 사실을 말하였다는 등의 다른 사정이 없다면, 차주가 그 후 제대로 변제하지 못하였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변제능력에 관하여 대주를 기망하였다거나 차주에게 편취의 범의가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피고인과 피해자는 2000년경 회사에서 같이 근무하면서 직장동료로 처음 알게 된 이후 피해자는 2004년경 홍보 및 행사를 사업목적으로 하는 회사를 창업하고, 피고인도 2007년경 방송국으로 이직하면서 서로 근무처가 달라졌으나, 둘은 업무상 종종 연락하였고, 특히 피고인과 피해자는 이 사건 차용 직전인 2014년 피고인이 이직한 방송국의 외주 프로젝트와 관련하여 10개월 정도 같이 일한 적도 있었다"고 지적하고, "이와 같은 사정에 비추어 보면, 피해자는 피고인의 사정이나 경제적 형편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피고인이 2015. 2. 1.경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서 피해자에게 소비대차 여부를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사항에 관하여 허위사실을 고지하는 등으로 피해자를 기망하거나, 피해자를 착오에 빠뜨린 것은 없어 보인다"며 "오히려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돈을 융통할 곳이 없다'며 자신의 신용부족 상태를 미리 고지하였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돈을 빌리면서 '2월 말까지 갚겠다'고 말한 것도 기망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피고인과 피해자는 변제기나 이자 등, 변제조건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적이 없고, 피해자가 2015. 2. 말 피고인에게 변제독촉을 하거나 피고인이 그 무렵 피해자에게 변제기 유예를 요청한 적이 없는 점, 피고인이 방송국에서 퇴사한 이후인 2017. 4. 27.경에야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비로소 변제독촉을 한 점 등에 비추어 보면, 피고인은 조속한 변제의 다짐 내지 추상적인 변제가능성을 고지하는 차원에서 '2월 말까지 갚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일뿐, 피해자와의 사이에서 차용금의 변제기를 2015. 2.말로 확정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차용 당시 피고인에게 변제의사가 없었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며 "차용금 채무는 변제기의 정함이 없는 채무로서 2017. 4. 27. 피해자의 변제독촉으로 비로소 변제기에 도래한 것으로 보이고, 이후 피고인의 채무불이행은 실직으로 인한 경제사정의 악화라는 사후적 사정변경 때문으로 볼 여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피고인의 경제사정은 피고인이 방송국에서 해고된 2016. 12. 26. 이후 급격히 나빠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차용일로부터 1년 10개월 후이므로, 피고인이 차용 당시 '자력 부족으로 차용금을 2015. 2.말까지 변제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거나, 그럼에도 차용을 감행함으로써 변제불능의 위험을 용인하였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며 "설령 피고인이 변제불능의 위험을 인식 · 용인하였다고 보더라도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돈을 융통할 곳이 없다'며 자신의 신용부족 상태를 미리 고지한 이상 피해자가 변제불능의 위험성에 관하여 기망을 당하였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시했다. 피고인에게 변제의사나 능력이 없었고, 적어도 차용금 편취에 관한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고 단정하여 유죄를 인정한 원심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