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통신] 터키, EU 가입의 불씨 다시 타오를 수 있을까
[중동통신] 터키, EU 가입의 불씨 다시 타오를 수 있을까
  • 기사출고 2021.03.0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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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영 변호사]

추억의 게임인 부루마블 보드의 첫 번째 변 아홉 번째 칸에 위치한 도시가 이스탄불이었다. 수식어는 '동서양의 교차로'. 게임판의 이웃은 실제와 같이 이집트의 카이로와 그리스의 아테네다.

터키가 지리상 유럽과 아시아가 만나는 위치에 있으니 '동서양의 교차로'란 별칭이 특별할 것도 없지만, 그 역사, 문화, 언어부터 법제까지 살피다 보면 이 별칭이 주는 느낌이 심상치 않게 다가오기도 한다.

◇배지영 변호사
◇배지영 변호사

현재 터키공화국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오스만투르크제국은 19세기 초까지 아시아의 아나톨리아 반도와 유럽의 발칸반도를 주영역으로 아우르는 대제국이었다. 술탄을 비롯한 주된 지배계급은 동아시아에서 기원한 투르크 계열의 무슬림이었으나, 지배층을 도와 나라를 운영한 인력은 그리스, 헝가리를 비롯한 유럽 출신이 많았다.

어떤 기업에선 유럽 본부에서 관리

터키와 서로 형제의 나라라고 일컫는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 유목민족으로서의 혈연적 근접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 있는 듯하다. 자칭 중동전문가인 필자의 입장에서는 터키를 중동에 포함시킴이 마땅하지만, 어떤 한국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는 유럽 본부에서 이 나라를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중동에 포함시킨다면, 터키는 중동국가 중 (이란과 함께) 8천만을 넘는 인구를 보유하고 상당히 발전한 제조업 기반을 갖추었으며 주변국의 무력분쟁에 적극적으로 군사력을 개입시킬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플레이어가 된다.

그러나 터키 정부는 오랫동안 중동을 벗어나 유럽연합(EU)에 가입하기를 희망해왔다. 1959년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에 준회원 신청서를 제출했고, 1987년에 정회원 가입 신청을 했다. 1999년에는 EU에도 정회원 신청을 했으나, (나토 회원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발 주자이자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이었던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의 EU 가입이 승인되는 동안에도 밀려나 여전히 후보국에 머무르고 있다.

2005년부터 터키의 EU 가입을 위한 협상이 시작될 것이라는 공식발표가 나면서 EU 가입에 대한 터키 국민의 기대(혹은 이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터키 정부의 홍보)는 극에 달했다. 상품의 가격표에 표시된 통화가 터키 리라화에서 유로화로 바뀌었고, 곳곳에서 도로와 건물을 현대식으로 개조하였으며, 터키 언론들은 터키가 EU에 가입함으로써 얻게될 긍정적인 효과에 집중하여 보도를 내보냈다.

터키가 EU에 가입하고자 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 가장 크다고 설명된다. 1990년대의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터키경제가 큰 충격을 받은 후, EU와 경제공동체로 묶임으로써 이러한 위기를 다시 겪지 않겠다는 터키 정부의 의지가 본격화되었다는 분석이다.

반면 EU 내에서는 터키의 가입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이 줄곧 존재해왔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훨씬 다양한 분석이 제시된다. 인권 관련 문제(터키 영내 쿠르드족에 대한 터키 정부의 반인도적 행위, 1차 세계대전 시기에 벌어진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 사건), 2006년 9 · 11 테러 이후 유럽에서 고조된 반이슬람 정서, 사이프러스 영토 문제와 동지중해에서의 자원개발 문제를 둘러싼 그리스와 사이프러스의 반대, 회원국의 인구에 비례하여 의사결정권을 분배하는 EU 헌법에 따라 터키에게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독일과 대등한 수준의 지위가 부여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 때문이라는 것이다.

EU 가입을 위한 꾸준한 법령 개선

공식적으로 EU가 표명해 온 주된 가입 반대의 사유는 터키가 민주주의, 법치, 언론의 자유, 사법부의 독립성, 인권 문제 등에서 유럽의 기준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터키 정부는 2005년 이후 EU가 가입조건으로 내세운 표면적인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고(아르메니아와 관계정상화 선언 등), 특히 유럽연합이 기준에 반한다고 지적한 법령에 대한 제정 및 개정 작업도 꾸준히 해 나갔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2016년 제정된 터키의 개인정보보호법(Personal Data Protection Law No. 6698, 2018년 발효)이다.

터키의 개인정보보호법은 터키내 사업체 및 터키내 사업체와 거주자의 개인정보를 취급하는 해외 소재 주체에게 개인정보를 보호할 의무를 부과하고 해당 주체가 이를 위해 준수해야 할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이 법은 터키의 EU 가입기준 충족을 위해 EU의 1995년 개인정보보호법에 기반하여 제정된 것이다. 불과 한 달 후 EU는 보다 강화된 새로운 General Data Protection Regulation을 발표하였지만 이 새 EU 규정을 반영한 터키의 개인정보보호법의 개정은 없었는데, 아마도 아래에서 보게 될 2016년 터키의 쿠데타 이후 EU 가입 절차를 진행할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흥미로운 사실은, 비록 터키의 개인정보보호법이 거의 오로지 터키의 EU 가입을 위한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지만, 이법에 따라 정보보호위원회라는 감독기구가 신설되고 감독 결과에 따른 벌금 부과가 반복되어 이해관계자들이 생겨나면서 그 법제가 자체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운영되고 확립되어 갔다는 점이다. 터키 정보보호위원회는 개인정보보호에 필요한 행정적 · 기술적 조치를 취하지 않고 개인정보를 유출했다는 혐의로 2019년에만 페이스북에 2차례 벌금을 부과하였다(약 29만 달러와 160만 달러).

터키의 노력은 2016년 7월 15일 터키 군부가 에르도안 대통령에 대항하여 일으켰다가 6시간 만에 진압되고 이후 국가비상사태 선포 및 대규모 숙청을 불러왔던 쿠데타 이후 사실상 좌절된 것으로 보였다. 쿠데타 이후 에르도안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이 강화되고 쿠르드 반군에 대한 군사적 충돌이 심화되면서 EU와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2017년에는 유럽의회가 터키의 EU 가입에 관한 협상을 중단하라고 EU와 회원국에 촉구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표결로 채택했다(회원국에 대한 강제력은 없으나 협상을 지연할 추가 명분이 되었다). 여기에다 터키가 2019년 러시아로부터 S-400 대공미사일시스템을 도입하면서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쿠데타와 꿈의 좌절

필자가 지난해 초 이스탄불을 방문했을 때 협력 로펌의 변호사 2인에게 터키의 EU 가입에 아직 희망이 있다고 보느냐고 질문을 했다. 한 명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답했고, 다른 한 명은 "Never"라고 단언했다.

이렇게 터키가 결국 EU와는 연을 맺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기정사실로 되어가던 지난 1월 영국과 EU 간의 브렉시트 관련 미래관계 협상이 타결되기 직전에,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이 영국이 떠난 EU의 빈자리를 터키가 차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터키는 "EU 가입이라는 최종 목표를 포기하지 않았다"며 "EU와의 관계를 정상궤도에 올려놓을 준비가 돼 있다"고 덧붙였다. 동지중해 천연자원 개발을 둘러싼 그리스와의 갈등도 개선되기를 희망했다. 시리아 및 리비아 내전,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교전 등에 대한 입장에서 갈등을 일으켰던 프랑스와의 긴장 완화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 노회한 스트롱맨이 진정으로 의도하는 바를 파악하기까지는 좀 더 기다려봐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이 시점에 다시 나온 EU 가입 의지의 천명이, 아직은 중동에 속해 있는 터키에 불어오는 중요한 변화의 바람이 되지 않을까 주의를 기울여 볼 필요는 충분해 보인다.

배지영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 jiyoung.bae@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