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 벌여도 隻지지 말아야"
"송사 벌여도 隻지지 말아야"
  • 기사출고 2007.02.09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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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주 변호사]
요즈음의 법과대학 교과과정이 지난 시절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사법연수원의 교과목이 매우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고 로스쿨(law school) 도입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라는 소식으로, 법과대학의 교과과정을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박영주 변호사
하지만 이런 변화 속에서도 옛 선조들의 생활에 대한 무관심은 여전한 것 같다. 법과대학 입학 후 20년, 실무에 뛰어든 지 10여년을 지내면서 조금씩 늘어난 책들 속에 우리 옛 선조들의 법생활에 관한 것이 거의 없는 것을 보면, 나의 무관심 역시 여전한 듯 하다.

그 와중에 먼지 덮힌 책들 속에서 오랜만에 찾아낸 우리 옛 선조들의 법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대학 초년생 시절 가졌던 호기심을 새삼스럽게 하는 것이 단지 송사에 관여하는 직업에 지쳤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여, 몇 가지 이야기를 전한다. 박병호 전 서울대교수가 펴낸 '한국의 전통사회와 법(서울대학교 출판부)'에 특히 재미있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척(隻)'이라는 말은 본래 '짝 있는 새들 중 한마리'라는 의미로, 조선시대에는 '소송상대방, 즉 피고'를 뜻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을 '원고(原告 또는 元告)'라고 하고, 그 상대방이 되는 사람을 '피고인(被告人)' 또는 '피론(被論)'이라고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피론(被論)을 '원척(元隻)' 또는 단순히 '척(隻)'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다만 '다른 사람에게 원망을 사지 말라'는 의미로 적지 않게 사용하고 있는 '척지지 말아라' 또는 '원수가 되다'는 표현인 '척지다'는 말 속에 남아있는 말이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어쩌다가 소송상대방을 뜻하는 '척(隻)'이라는 말이 세월이 지나면서 '원수(怨讐)' 또는 '원망(怨望)'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해 박 교수는 그것은 바로 송사를 벌이는 동안 당사자 사이의 인간관계가 모두 파괴되고, 그래서 대(代)를 이어 싸우는 원수가 되어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노학자의 해석에 따르면, 당초 '척지지 말라'는 속언의 의미는 '(함부로) 소송을 제기하지 말아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이런 저자의 해석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직접 경험한 소송당사자들의 모습이 만만치 않다.

소송상대방을 뜻하는 '척(隻)'이 '원수(怨讐)'라는 뜻을 가지게 된 이유에 대해 박 교수는 우리 옛 사법제도에 분쟁당사자와 심판자인 관청 사이에서 이를 조정할 수 있는 '중재자'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분쟁이 발생했을 때 당사자들의 주장을 성심껏 들어주고, 그에 따른 합리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여 분쟁을 소송 이외의 방법으로 종결시킬 수 있는 완충지대가 없었기 때문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식으로 송사를 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조그마한 이해관계를 두고 다투던 상대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느 덧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재자'의 부재는 소송대리인이라는 직업이 수천 년을 이어온 서양의 사법제도와 크게 다른 것인데, 실상 조선 중기인 16세기까지는 우리에게도 지금의 변호사와 같이 소송대리를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즉, 서울의 형조(刑曹), 한성부(漢城府), 장예원(掌隸院) 등 송사를 담당하는 관사 주변에서 소송을 제기하러 오는 사람이나 이미 소송을 진행중인 사람들을 대리하여 문서를 대신 작성하여 주는 것은 물론, 소송기술을 전수해 주고 필요한 경우 당사자들에게 고용되어 소송대리인으로 소송을 진행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외지부(外知部)'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외지부(外知部)'가 송사에 관여하면 사건이 복잡해지고, 소송이 지연되어 분쟁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것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성종(成宗) 9년 외지부(外知部)를 붙잡아 곤장 100대의 형벌(杖一百刑)에 처하고, 일가족을 함경도 변방에 유배할 뿐 아니라, 이들을 신고하는 자에게는 강도를 붙잡은 모범시민에게 포상하는 것과 같이 면포 50필을 지급하기로 하는 법령을 시행하게 되었고, 결국 그 이후 변호사의 시초라고 할 외지부(外知部)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송사(訟事)는 패가망신(敗家亡身)"이라는 말이 없어지지 않고 이어진 것을 보면, 과연 외지부(外知部)가 송사를 이유 없이 복잡하게 하고, 신속한 분쟁 해결을 가로 막는 못된 역할만을 했었는지, 그래서 이를 금지시킨 성종의 시책이 옳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성종의 금지법률 반포 이후 약 430여년이 지난 1905년 11월 대한제국 법률 제5호로 외지부(外知部)의 후예라고 할 '변호사법'이 시행된 것을 보면, 차라리 외지부(外知部)들을 잘 양성하여 민원(民願) 해결에 도움을 주는 호민관(護民官)으로 활동하도록 허용했었으면 오히려 민초(民草)들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세상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다툼은 피할 수 없는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다툼으로 인한 마음의 병이 남은 인생 전체를 병들게 하고, 망가지게 하는 것은 피할 수 있는 일이다. 아니 반드시 피해야만 하는 일이다.

송사에 관여하는 것을 업(業)으로 선택한 나를 오늘도 계속 나아가도록 하는 것은 나의 의뢰인들이 다른 사람과의 다툼 때문에 가지게 될 마음의 병을 조금이라도 나누어지고, 누그러뜨리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일지 모른다. 나를 믿고, 함께 의논하며, 마음의 병을 나누어지고 있는 의뢰인들에게 감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박영주 변호사(법무법인 지평, yjpark@horizonlaw.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