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 "일몰 후 미등도 안 켠 채 작업차량 세워놓고 작업하다가 음주차량에 치여 사망…작업차량도 책임"
[교통] "일몰 후 미등도 안 켠 채 작업차량 세워놓고 작업하다가 음주차량에 치여 사망…작업차량도 책임"
  • 기사출고 2019.09.16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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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사고 발생 · 손해 확대에 인과관계 있어"

해가 진 후 도로에 차폭등과 미등을 켜지 않은 상태로 작업차량을 정차해놓고 전선 작업을 하던 작업자들이 작업을 마치고 작업차량으로 돌아가던 중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사망했다. 대법원은 점등을 하지 않은 작업차량에도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대법원 제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8월 29일 숨진 작업자의 보험사인 한화손해보험이 작업차량의 보험사인 DB손해보험을 상대로 낸 구상금 청구소송의 상고심(2016다259417)에서 이같이 판시, 한화손해보험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남부지법으로 되돌려보냈다. 다만, 작업차량의 구체적인 과실비율은 직접 판단하지 않고, 하급심에 맡겼다.

2011년 10월 28일 일몰시간 이후인 오후 6시쯤 전북 진안군의 26번 국도 편도 1차로에서 전선 지중화 작업을 수행하고 있던 A씨 등 3명은, 작업을 마친 후 도로 우측에 정차한 작업차량으로 돌아가던 중 혈중알코올농도 0.190%의 만취 운전자가 끄는 무보험차량에 치여 3명이 모두 즉사했다.

이에 A씨와 무보험자동차에 의한 상해보험계약을 체결한 DB손해보험이 A씨의 유족들에게 보험금 1억 5130여만원을 지급한 뒤, 같은 무보험자동차에 의한 상해보험계약을 A씨와 체결한 또 다른 보험사인 한화손해보험으로부터 중복보험에 따른 분담금으로 A씨 유족에게 지급한 보험금의 절반인 7560여만원을 돌려받았으나, 한화손해보험은 이후 "사고 현장에 있던 작업차량이 등화를 켜지 않은 과실 등이 경합하여 발생한 것"이라며 작업차량과 자동차종합보험을 체결한 DB손해보험을 상대로 지급한 분담금 7560여만원을 반환하라고 소송을 냈다. 한화손보는 "A씨의 유족들이  자동차종합보험에 의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으므로, 이를 공제하면 원고가 A씨에게 보험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사고 당시 전선 지중화 작업에 동원된 작업차량 2대는 차폭등과 미등을 켜지 않은 상태였으며, 작업차량 1대는 좌측 전방부가 도로 안쪽을 향하도록 도로 우측에 비스듬히 정차해 약 1m가량 도로를 침범한 상태였다. 또 다른 작업차량도 도로 우측에 정해 있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사고는 가해 차량 운전자의 비정상적인 음주운전이 원인이 되었다고 보일 뿐, 원고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사고의 발생과 작업차량의 주차 위치나 등화를 켜지 않은 것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며 한화손해보험의 청구를 기각했다.

대법원은 그러나 "사고가 발생한 시각이 일몰 이후라도 인공조명 없이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이른바 시민박명(市民薄明, 밖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시간대의 밝기) 상태였던 점은 인정할 수 있으나, 대낮에도 점등을 한 차량과 그렇지 않은 차량 사이의 식별력은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점에 비추어, 비록 시민박명 상태라고 할지라도 피고차량(작업차량)들이 도로교통법에 따라 점등을 하였을 경우 그 식별력이 현저히 증가함은 당연하다"며 "그렇다면 가해자가 비록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운전을 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여 피고차량들이 점등을 하였을 경우에 그렇지 않은 경우와 비교하여 가해자가 보다 멀리서 피고차량들을 발견하거나 그에 따라 감속 등의 조치를 취하였을 가능성이 없었다고 쉽게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보도와 차도가 구분되어 있지 않던 이 사건 도로의 편도 1차로의 폭은 약 3.3m, 우측 갓길의 폭은 약 0.5~0.8m이었고, 폭이 약 1.75m인 피고차량들이 사고 당시 도로를 약 1m 침범한 상태로 정차 중이었으므로 당시 피고차량들 우측에 0.5m 이상의 공간이 존재할 수 없었음은 계산상 명백하고, 또한 전선 지중화 작업을 위하여 필요한 전신주와 통신케이블이 도로 우측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점, 경험칙상 작업현장과 바로 인접한 후방에 작업차량을 정차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고려할 때 피해자 일행은 피고차량의 바로 우측 전방에서 작업을 하였을 개연성이 높다"고 지적하고, "따라서 사고는 작업을 마치고 피고차량들에 탑승하기 위해 돌아오려던 피해자 일행이 피고차량들 우측에 충분한 공간이 없자 피고차량의 좌측 문으로 승차하기 위하여 피고차량의 좌측 도로 위를 보행하다가 당시 좌측 전방부를 도로 안쪽으로 비스듬히 정차한 피고차량의 좌측 전방부로 인하여 시야가 가려져 가해차량이 돌진하여 오는 것을 보지 못하여 발생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따라서 "결국 피고차량들이 도로교통법 규정에 따라 점등을 하고 우측 공간을 확보하여 정차하였다면 가해차량이 보다 멀리서 피고차량들을 발견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피해자 일행이 피고차량들 우측으로 보행함으로서 피해를 최소화하여 최소한 전원이 현장에서 즉사하는 사고는 피할 수 있었을 여지가 충분하다"며 "그렇다면 도로교통법상 주정차방법을 위반하여 점등을 하지 않거나 도로 우측 공간을 확보하지 않은 피고차량들의 과실과 사고의 발생 및 손해의 확대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고 단정할 수 없고, 만취 상태에서 운전한 가해차량의 과실이 중대하다고 하여 피고차량들의 과실과 사고 발생 사이의 인과관계가 단절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판시했다. 피고차량들의 과실과 사고의 발생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원심에는 잘못이 있다는 것이다.

도로교통법에 37조 1항 1호 등에 따르면, 모든 차의 운전자는 밤(해가 진 후부터 해가 뜨기 전까지)에 고장이나 그 밖의 부득이한 사유로 도로에서 차를 정차 또는 주차하는 경우 차폭등과 미등을 켜서 다른 차량의 운전자들이 주정차된 차량을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또 같은법 34조 등에 따르면, 모든 차의 운전자는 도로에서 정차할 때에 차도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정차하여야 하고, 다만 차도와 보도의 구별이 없는 도로의 경우에는 도로의 오른쪽 가장자리로부터 중앙으로 0.5m 이상의 거리를 두어 보행자가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