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 제도로 인적 인프라 갖춰졌다…디스커버리 도입해 증거조사 수준 높이자"
"로스쿨 제도로 인적 인프라 갖춰졌다…디스커버리 도입해 증거조사 수준 높이자"
  • 기사출고 2019.05.1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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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두 부장판사, "민사합의 · 증권집단소송부터 도입하자"
"1심 사실심리 충실화되면 화해 · 조정 사건도 증가할 것"

법원행정처가 매년 발간하는 사법연감에 따르면, 제1심 민사판결에 대한 항소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고, 항소심인 제2심에서의 심리기간은 더 길어지고 있다. 지법 합의사건의 판결에 대한 항소율은 1997년에 30.8%였는데, 10년 후인 2007년에 40.6%로 무려 약 10%p가 증가하였고, 2017년에도 40.5%로 증가한 채 머무르고 있다. 지법 단독사건의 판결에 대한 항소율은 1997년에 4.0%였고, 10년 후인 2007년에도 4.0%였는데, 2017년에는 6.6%로 1.5배 이상 높아졌다.

◇제1심 민사합의사건의 추이(출처: 사법연감)
◇제1심 민사합의사건의 추이(출처: 사법연감)

또 민사소송법에 따르면, 1심 판결은 소가 제기된 날로부터 5월 이내에, 항소심 및 상고심에서는 기록을 받은 날부터 5월 이내에 선고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2017년 항소심에서 5월 내에 처리되는 사건비율은 고법 31.6%, 지법 30.2%로 30%를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 

항소율 증가 · 항소심 심리기간 더 길어져

항소율이 높아지고, 항소심의 심리기간이 길어지는 원인은 무엇일까. 서울고법의 김형두 부장판사는 점점 더 많은 사건이 항소되고 있는 현상의 가장 큰 원인을 제1심에서의 증거조사가 충분하고 철저하게 시행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이러한 1심에서의 불충분한 증거조사, 1심 판결 부실화의 근본원인을 민사재판에서의 증거조사의 어려움에서 찾았다. 우리나라의 민사소송에서는 증거를 가지고 있는 당사자가 자진하여 증거를 제출하지 않아도 그 제출을 강제할 수 있는 효율적 방법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민사소송에서 사용할 증거를 수사기관을 통하여 수집하려는 목적에서 형사고소 · 고발에 의지하려 하고, 1심 재판에서 패소한 당사자는 항소하여 추가적인 증거수집을 시도한다.

즉, 제1심에서의 불충분한 증거조사→제1심 판결의 부실화→항소율 증가→제2심에서의 추가 증거조사 증가→추가로 밝혀지는 사실관계 증가→제1심 파기율 증가→제1심 판결에 대한 항소율 증가→제2심 법원의 부담 증가→제2심 법원의 심리기간 장기화→분쟁의 종국적 해결 지연이란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김 판사의 의견이다.

김 부장판사는 지난 4월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출간된 《법학평론》 제9권에 기고한 "새로운 법조양성체제하에서 미국식 디스커버리의 도입 방안"이란 제목의 논문에서 이같이 지적하고, "로스쿨 도입 이후 변호사가 많이 늘어나고 비용이 낮아지는 등 변호사시장의 환경이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만큼 미국식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해 1심 민사재판에서의 증거조사를 강화하자"고 주장했다. 일단 민사합의사건에서부터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나, 도입범위를 매우 극단적으로 제한한다면, 2005년 시행 이후 2018년 1월까지 제소된 사건 수가 단 10건에 불과한 증권관련집단소송에 한하여 먼저 도입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게 그의 의견. 김 판사는 "법학전문대학원 도입 이후 변호사가 급증해 디스커버리 제도에 투입할 인적 인프라도 갖추어진 상황"이라고 갈파했다. 김 판사는 미국식 집단소송제인 증권관련집단소송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도 증거조사제도의 미비로 인한 증거수집의 어려움이라고 지적했다.

개별사건에 투입되는 변호사의 역량이 더 많이 필요한 미국식 디스커버리 제도는 소수정예의 변호사 체제하에서는 도입이 어렵고, 많은 수의 변호사가 있어야 운영이 가능한 제도다. 미국의 실무를 보면 디스커버리 절차로 인해 제출된 문서가 수천 페이지 정도일 때에는 보통 한 명의 변호사가 혼자서 처리하지만 검토할 문서가 십만 페이지가 넘어가면 한 명이 하기는 버겁고 4~6명의 변호사가 팀을 구성하여 처리하며, 문서가 아주 많으면 문서만 검토해주는 document reviewer를 별도로 고용하기도 하고, E-discovery를 전문적으로 대행해주는 업체들도 있다.

전국의 개업변호사 21,803명

따라서 과거에는 우리나라의 경우 변호사 수가 너무 적어서 디스커버리 제도를 운영할 인적 자원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나, 김 판사는 "로스쿨 도입 이후 변호사 인구의 증가와 낮아진 변호사 보수로 인하여 개별 사건에 투입할 수 있는 변호사의 수가 늘고 비용이 감소한 만큼 미국식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하여 사실심 증거조사의 수준을 미국 못지않게 높일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지난 4월 말 기준 전국의 개업변호사는 2만 1803명, 로스쿨 도입 전인 2010년의 1만 263명에 비해 2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김 판사는 "게다가 법학전문대학원 제도하에 양성되고 있는 변호사들은 대학 학부 시절 뛰어난 성적을 거둔 우리 사회의 우수한 인재들로, 이러한 변호사들의 역량을 개별 사건의 디스커버리 절차에 투입한다면 지금의 변호사 수만으로도 충실하게 증거자료를 수집할 수 있다"며 "이제는 우리나라에도 디스커버리 제도에 투입할 인적 인프라가 제대로 갖추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우리나라 증거조사제도와 미국 디스커버리 제도의 비교
◇우리나라 증거조사제도와 미국 디스커버리 제도의 비교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하면 어떤 장점이 있을까. 김 판사는 "제1심에서의 증거수집을 더 충실히 해 1심의 사실심리가 충실화되면 항소심 이후에는 사실심리를 할 필요성이 대폭 감소할 것"이라며 "사실관계가 명백히 밝혀짐으로써 1심에서 승패 가능성이 확연해지고 화해 및 조정으로 종결되는 사건이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항소심은 사후심처럼 운영될 수 있을 것이고 장차 법률심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될 것이며, 항소사건이 줄어들 것이고, 상고사건도 줄어들 것"이라며 "현재의 원통형 심리구조에서 사법 선진국들의 원추형 심리구조로 변환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원통형 심리구조에서 원추형 심리구조로 변환

물론 미국식 디스커버리 제도는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피고가 될 수 있는 기업에 커다란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김 판사는 그러나 "디스커버리 절차의 남용은 법원이 적절히 개입하여 보호명령을 함으로써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며 "법원의 감독하에 진행되는 디스커버리 절차는 적정한 판결을 선고하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김 판사는 "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으로 법원에서 실체관계에 부합하는 적정한 판결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 기업들에게 큰 혜택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으로 기업을 포함한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더욱 적법하고 정의롭게 행동하게 되면 그만큼 사회적 부조리 · 비효율이 감소될 것이고 상당한 비용절감 효과가 생길 것이며, 이러한 긍정적인 사회적 · 경제적 효과는 사회 전반에 근본적이고 심대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개별 기업들이 디스커버리 절차에 투입하는 비용과 시간의 합산에 비하여 훨씬 더 클 것이라는 의견이다.

김 판사는 미국식 디스커버리 제도를 우리 소송법에 도입하는 구체적인 방안도 소개했다.

미국의 디스커버리 제도는 증언녹취서(deposition), 질문서(interrogatories to parties), 문서제출요구(request for production of documents), 토지출입검증(entering onto land), 신체 및 정신검사(physical and mental examinations), 자백의 요구(request for admissions), 보호명령(protective order), 법원의 강제명령, 그 명령위반에 따른 제재(구금, 벌금, 손해배상, 소 각하, 궐석판결, 불리한 사실인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 판사는 우선 증언녹취서 제도와 관련, 판사가 직접 참여하여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변론절차상의 증인신문에 앞서, 법원직원 또는 공증인 앞에서 증인이 선서를 하고 원고와 피고 대리인이 자율적으로 신문하는 증언녹취서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물론 현재도 당사자는 필요한 경우에 제3자 진술의 녹음 및 녹취서를 증거로 제출하고는 있으나, 이는 일방적인 진술에 불과하여 실체적 진실 발견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김 판사는 "증언녹취서 제도에서는 양측 대리인이 번갈아 신문을 하게되므로 반대신문을 통하여 증언의 신빙성을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이러한 점에서, 증언녹취서는 어느 일방이 제3자의 진술을 녹음 및 녹취하여 제출하는 것보다 훨씬 유용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문서제출명령 대상의 확대. 김 판사는 "변론준비절차에서 문서제출명령신청에 의하여 상대방에게 요구할 수 있는 문서의 범위를 대폭 확대하여야 한다"며 "그 범위는 미국 연방민사소송규칙 34조에 규정된 내용과 동일한 정도로 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미 연방민사소송규칙 34조는 일방 당사자가 상대방에게 상대방이 소유, 보관 또는 지배하고 있는 문서 또는 전자적 자료 및 유체물의 제출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글, 도면, 그래프, 차트, 사진, 녹음, 이미지 또는 기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매체가 모두 포함된다.

김 판사는 문서제출의무를 불이행하는 경우에 받을 수 있는 제재를 강화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그에 따르면, 현행 민사소송법은 문서제출명령에 불응하거나 상대방의 사용을 방해할 목적으로 제출의무 있는 문서를 훼손하거나 이를 사용할 수 없게 한 경우에는 그 문서의 기재에 관한 상대방의 주장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나, 이는 그 문서에 관한 주장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할 뿐이고 그것에 의하여 증명하고자 하는 사실까지 진실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어서, 제재가 매우 약한 수준이다. 김 판사는 "미국 연방민사소송규칙 37조와 같이 문서제출명령을 신청한 당사자가 주장하는 사실관계를 진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도록 하여, 제재를 강화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일본 민사소송법 224조는 문서제출명령 위반의 제재 방법으로, "상대방이 문서를 제출하지 아니하거나 그 사용을 방해한 경우, 당해 문서의 기재에 관하여 구체적인 주장을 하는 것과 당해 문서에 의하여 증명할 사실을 다른 증거에 의하여 증명하는 것이 현저히 곤란한 때에는 법원은 그 사실에 관한 상대방의 주장을 진실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하나는 문서목록제출의무의 강화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정보의 제출을 요구하려면 상대방이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2002년 민사소송법 개정으로 도입된 문서목록제출신청 제도는 그 범위가 문서로 한정되어 있고 불이행시 제재수단이 없어 실무상 거의 활용되고 있지 않다. 김 판사는 "그 범위를 '문서'에서 '주장 및 공격방어방법과 관련한 모든 정보의 목록과 그 소지자와 보관장소에 대한 정보'로 확대하여야 하고, 목록제출을 불이행한 경우에는 문서제출명령의 위반에 준하는 정도의 불이익을 입게 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큰 사건은 1년 정도 소요

미국에서 디스커버리 절차에 들어가는 시간은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작은 사건은 4~5개월, 큰 사건은 1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재판의 양 당사자가 디스커버리 절차에 성실하게 응하는 이유는 증거조사에 대한 협력의무를 위반하는 경우에 받게 되는 불이익과 제재가 매우 강력하기 때문이다. 제1심 디스커버리 절차의 강력한 증거조사 덕분에 항소심 이후에는 더 이상 증거조사를 할 필요가 없게 되고, 미국의 항소심은 사실심이 아닌 법률심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재판구조가 제1심이 아주 강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며 항소심 이후는 사후심으로서 법률적 쟁점에 관하여만 판단하게 되어 있다.

김 판사는 "변론준비절차의 일종으로 디스커버리 절차를 도입하여, 변론절차에 들어가기 전에 증거조사를 철저히 시행하면 사실관계가 조기에 확정될 것이고, 그 결과 쌍방 당사자들은 소송의 승패를 예측하기 쉬워질 것"이라며 "디스커버리 절차를 도입하면 화해 또는 조정으로 조기에 종료되는 사건의 비율이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고, 그렇게 되면 법원에서 정식 변론절차를 거쳐 판결로 종료되는 사건의 수가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1심 재판절차에서 종결되는 사건이 현저히 증가할 것이고, 항소심은 법률심의 성격이 강해져서 법률이론과 판례의 발전이 촉진될 것이며, 항소심에서 충분한 법률심리를 하게 되면 제2의 법률심이 되는 대법원의 상고사건이 감소하여 대법원이 최종심으로서의 기능을 강화하는 데도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미국식 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을 주장하는 김 판사가 내다보는 선진재판제도의 모습이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