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성폭행 무죄'에 피해 부부 자살…가해 남성에 유죄 판결
[형사] '성폭행 무죄'에 피해 부부 자살…가해 남성에 유죄 판결
  • 기사출고 2018.11.0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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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성폭행 심리때 '성인지 감수성' 유의해야"

아내의 성폭행 피해를 주장했으나 1심에서 가해 남성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부부가 함께 목숨을 끊은 사건과 관련, 대법원이 하급심 판결을 뒤집고 유죄 취지로 판결했다.

대법원 제1부(주심 박정화 재판관)는 10월 25일 강간과 상해, 폭행 등의 혐의로 기소된 박 모(38)씨에 대한 상고심(2018도7709)에서 강간 혐의는 무죄로 보아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강간도 유죄라는 취지로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되돌려보냈다. 대법원은 특히 이 판결에서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을 심리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한다고 밝혔다.

박씨는 2017년 4월 10일 고향친구인 A씨가 베트남으로 해외출장을 가자 오후 11시쯤 계룡시 금암동에 있는 커피숍 앞길에 주차된 승용차 안에서 피해자 A씨의 아내 B(당시 32세)씨가 듣고 있는 가운데 휴대전화 스피커폰 기능을 이용해 지인들과 통화하면서 마치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위해를 가할 것처럼 B씨를 위협하다가 갑자기 손바닥으로 B씨의 뺨과 머리를 3~4회 때리고, 사흘 후인 4월 14일 오후 11시 43분쯤부터 다음날 오전 1시 6분쯤까지 사이에 계룡시 엄사면에 있는 무인 모텔에서 B씨에게 말을 듣지 않으면 남편과 자녀들에게 위해를 가할 것처럼 협박해 B씨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박씨와 A씨는 유치원 시절부터 30년 이상 친구 사이로 지내왔고, 같이 논산지역 조직폭력단체에서 조직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박씨는 2017년 4월 10일 오후 2시쯤 커피숍에서 후배 두 명이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얼굴에 커피를 끼얹거나 머리채를 잡은 채 뺨을 수차례 때려 폭행과 상해를 가한 혐의 등으로도 기소됐다.

1심 재판부였던 대전지법 논산지원이 2017년 11월 박씨의 강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자, A씨 부부는 넉달 뒤인 올 3월 전북 무주의 한 캠핑장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며 '죽어서도 복수하겠다' 등의 내용이 담긴 유서를 남기고 함께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항소심을 맡은 대전고법도 강간 혐의에 대해 1심과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모텔 CCTV 영상에서 B씨가 모텔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겁을 먹었다는 사정이 보이지 않는 점, B씨가 모텔에서 박씨와 성관계를 가진 후 박씨에게 '템포'라는 상호의 생리대에 관하여 이야기하였고, 화장실에서 샤워하고 나와 박씨와 담배를 피우며 남편 등 가정 관련 대화를 10여분 하다가 모텔에서 나온 점, A씨가 베트남에서 귀국하여 바로 집에 들렀을 당시에 B씨가 곧바로 강간피해 사실을 말하지 않은 점 등을 이유로 강간을 당했다는 B씨의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법원이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한다(양성평등기본법 5조 1항 참조)"고 전제하고,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의 문화와 인식, 구조 등으로 인하여 성폭행이나 성희롱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피해자가 부정적인 여론이나 불이익한 처우 및 신분 노출의 피해 등을 입기도 하여 온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및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으므로, 개별적, 구체적인 사건에서 성폭행 등의 피해자가 처하여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나아가 "강간죄가 성립하기 위한 가해자의 폭행 · 협박이 있었는지 여부는 그 폭행 · 협박의 내용과 정도는 물론 유형력을 행사하게 된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성교 당시와 그 후의 정황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하여 피해자가 성교 당시 처하였던 구체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하며, 사후적으로 보아 피해자가 성교 이전에 범행 현장을 벗어날 수 있었다거나 피해자가 사력을 다하여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가해자의 폭행 · 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피해자의 진술 내용은 수사기관에서부터 1심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될 뿐만 아니라 매우 구체적임을 알 수 있고, 이 진술이 경험칙에 비추어 비합리적이라거나 진술 자체로 모순되는 부분을 찾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원심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하는 이유로 들고 있는 사정들은, 피해자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이나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 등에 비추어 피해자의 진술과 반드시 배치된다거나 양립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원심이 그러한 사정들을 근거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한 것은 성폭행 피해자가 처하여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성폭행 사건의 심리를 할 때 요구되는 '성인지 감수성'을 결여한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로, "피고인과 피해자의 진술에 의하더라도 당시 피해자는 피고인과 맥주를 마시고 이야기만 하다가 나오기로 하고 모텔에 갔다는 것이고, 모텔 CCTV 영상에 의하더라도 당시 피해자가 피고인과의 신체 접촉 없이 각자 떨어져 앞뒤로 걸어간 것 뿐"이라며 "그럼에도 이러한 사정을 들어 피해자가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나아가 모텔 객실에서 폭행 · 협박 등이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고 판단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B씨가 성관계를 가진 후 박씨와 대화를 10여분 하다가 모텔에서 나온 것에 대해서도, "강간을 당한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며 "피해자는 이전부터 계속되어 온 피고인의 협박으로 이미 외포된 상태에서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피고인으로부터 강제로 성폭행을 당하였다는 것이고, 수치스럽고 무서운 마음에 반항을 하지 못하고 피고인의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 달랬다는 것이므로, 피해자로서는 오로지 피고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의도로 이와 같은 대화를 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사정이 성폭행을 당하였다는 피해자의 진술과 양립할 수 없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A씨는 베트남에서 귀국한 당일 잠깐 집에 들러 옷만 갈아입고는 다시 집을 나가 광주에 있는 장례식에 가는 상황이었으므로, 피해자가 강간피해 사실을 A씨가 귀국하여 집에 도착한 즉시 말하지 않고 그날 저녁에 A씨가 장례식장에서 돌아온 이후에야 말하였다는 사정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배척할 만한 사정이라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