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공약은 선거공약일 뿐 국가정책 아니야"
"선거공약은 선거공약일 뿐 국가정책 아니야"
  • 기사출고 2018.10.22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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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 교수, "잘못된 정치행태로 헌법 규범력 훼손" 지적

지난 10월 18~19일 쉐라톤서울팔래스강남호텔에서 진행된 제11회 한국법률가대회의 주제는 "헌법 제정 70년과 법학의 변화"였다. 올해가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 지 70주년이 되는 해로, 그런 의미에서 이런 주제를 내걸었다는 것이 대회를 주관한 한국법학원 권오곤 원장의 설명이다. 이틀에 걸쳐 모두 25개 소주제에 관한 세미나를 소화한 이번 법률가대회에선 또 허영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가 "우리 헌법 규범력의 현주소-제헌 70주년의 성과와 과제-"를 주제로 기조발제해 한층 주목을 받았다.

허 교수는 우선 "건국에서부터 현행 헌법을 탄생시킨 1987년까지는 우리 헌정질서가 오늘의 자유민주적인 헌정질서로 발전하기 위한 과도기적 헌정의 진통기였다고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그 결과 공감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통합의 가치규범으로서의 헌법이 헌법으로서의 규범력을 올바로 나타내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핵심적인 내용으로 하는 국민의 기본권이 그 규범적인 효력을 나타내기 시작한 역사는 30여년에 불과하다"고 진단했다. 이어 "이 30여년의 헌정 상황을 돌이켜 보면 헌정 운영의 내용면에서는 여러 가지 헌법의 규범력을 훼손하거나 무시하는 정치행태가 여전히 계속되어 왔고 지금도 시정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며 "그 원인은 헌법의 규범적인 결함에서 기인하는 것을 비롯해서 헌법철학 내지 헌법인식의 오해, 집권자의 권력에 대한 집착과 독선 및 이념과잉적인 정치행태에서 유래하는 것도 있다"고 말했다.

◇허영 교수가 10월 18일 쉐라톤서울팔래스강남호텔에서 막을 올린 제11회 한국법률가대회에서
◇허영 교수가 10월 18일 쉐라톤서울팔래스강남호텔에서 막을 올린 제11회 한국법률가대회에서 "우리 헌법 규범력의 현주소"란 주제로 기조발제하고 있다.

허 교수는 헌법의 결함으로 인한 규범력 훼손의 예로 결선투표방식에 의한 절대다수선거제도 대신 상대다수대표선거제도로 대통령을 뽑는 대통령 선거방식과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으로 군림하는 반헌법적인 현상을 들고, 다음 개헌할 때는 반드시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서 대통령 후보자가 여러 명 나오더라도 과반 투표자가 없으면 최다 득표자와 차점자에 대한 결선투표를 통해 대통령이 반드시 과반수 지지의 강한 민주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임기를 시작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헌법이 채택한 대통령제의 규범력을 높이는 길이라는 의견인데, 지난번 문재인 대통령이 발의했다가 폐기된 개헌안은 대통령결선투표제를 채택했다.

허 교수는 "인사권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고 항변하지만, 헌법이 대통령에게 공무원 임면권을 주면서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절차와 방법에 따르게 한 취지는 국회의 임명동의권 행사나 인사청문절차를 통한 인사권의 견제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며 "최소한 인사청문 대상인 중요 국가기관의 장의 임명에는 국회의 인사청문보고서에 기속력을 부여하기 위한 국회법과 인사청문회법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검찰총장과 경찰청장 등 사정기관의 정치예속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들 사정기관의 장의 인선을 위한 독립적인 인사추천위원회를 두고 대통령의 자의적인 인선을 미리 예방하는 개선입법도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헌법철학 내지 헌법인식의 오해로 인한 규범력 훼손 현상에선 대의민주정치와 공론화 정책결정에 대한 의견이 주목을 받았다. 허 교수는 "대의민주주의 통치구조에서 중요한 정책을 대의기관이 아닌 이른바 비전문적인 '공론화 위원회'라는 임의의 한시적인 기구를 만들어 공론집약을 통해서 결정하도록 하는 일은 분명히 대의민주주의의 신임과 위임 및 책임의 기본원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공론화위원회는 국민으로부터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mandate) 받은 일도 없을 뿐 아니라 결정사항에 대한 전문성도 없어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도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원자력정책과 교육정책 등 국가의 중요한 전문적인 정책결정을 할 때마다 공론화 과정을 거친다는 구실로 그런 기구를 수시로 만드는 현상은 대의민주정치의 본질을 오해한데서 비롯한 잘못된 반헌법적 정치형태로, 이를 중단하는 것만이 대의민주정치를 지향하는 헌법의 규범적인 의미를 존중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허 교수는 이와 함께 정당대의민주주의와 정당의 이합집산, 빈번한 당명 변경을 헌법의 규범력을 훼손하는 예로 들고, "대의기관의 선거에서 국민의 투표를 통해 정해진 대의기관의 의석분포는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이 만들어 준 대의기관의 세력분포도라고 보아야 하고, 그래서 '여대야소'이건 '여소야대'이건 선거로 정해진 대의기관의 정당간 세력분포를 인위적 · 정치공작적인 방법으로 함부로 바꾸는 것은 바로 그러한 국민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라고 말했다. 더욱이 대의기관의 임기 중에 원내 진출 정당간에 이합집산을 하고 새로운 정당으로 등장하는 현상은 분명히 국민이 선거를 통해서 정당에 부여한 신임을 저버리는 일로 정당대의민주주의의 기본정신에 어긋나는 행위이며,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은 당명을 대의기관의 임기 중에 책임회피 내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감추려는 목적으로 임의로 바꾸는 일도 정당정치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게 허 교수의 의견이다. 허 교수는 "우리 헌정사에서 정치공작적인 원내세력구도 변경, 정당간의 이합집산과 당명변경 등 여러 가지 반 정당대의민주주의적인 현상이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은 우리 정당정치가 아직도 본궤도에 오르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며 "정강정책보다는 사람과 지역 중심의 정당문화도 이러한 부정적인 현상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허 교수는 정치행태의 잘못으로 인한 규범력 훼손의 예로는 포퓰리즘적인 선거공약의 남발, 대통령 측근의 정치개입과 부정부패, 대의기관인 국회의 당파성과 비생산성을 들었다.

허 교수는 "포퓰리즘적인 선거공약은 대부분 무상복지를 그 핵심내용으로 하기 때문에 막대한 재정투자가 불가피한 공약들이고, 비록 재정투자와는 무관한 선거공약이라 하더라도 선거공약은 표를 얻기 위한 선거전략적인 수단에 불과해서 선거 후 그 공약을 반드시 그대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선을 긋고, "그런데도 선거공약과 국가정책을 동일시해서 선거에 제시한 공약으로 당선되면 그 선거공약을 그대로 국가정책으로 집행할 수 있는 민주적 정당성을 획득한 것으로 착각하고 그대로 밀고 나가려는 그릇된 정치행태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 꼬집었다. 선거공약은 선거공약일 뿐 그것이 곧바로 국가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선거공약이 국가정책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정책결정의 절차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거공약을 하고 당선된 정치인은 정책결정 절차와 과정에서 최선을 다해 공약한 내용을 정책화하도록 노력하면 된다는 게 허 교수의 의견. 공약내용이 정책화 과정에서 변경될 수도 있고, 정책화에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허 교수는 "정치인은 그 결과를 국민에게 자세히 알리고 국민의 이해를 구하면 된다"고 했다. "그 결과에 대한 평가는 국민의 몫으로 남고 그 영향은 다음 선거에서 선거결과로 나타날 것"이라며 "그것이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작동하는 틀"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허 교수는 "적어도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국가재정과 미래세대의 부담을 외면한 포퓰리즘적인 정책공약의 남발을 자제해야 하고, 선거공약과 국가정책을 동일시하는 착시현상에서도 탈피해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작동하는 틀에 따라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에 따르면, 스위스에선, 모든 국민에게 국가가 기초생활비 명목으로 무상으로 큰 돈을 매월 지급하겠다는 정책공약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됐다.

허 교수는 "헌법의 규범적인 결함은 개헌을 통해서만 개선이 가능한 일이지만 헌법철학 내지 헌법인식의 오해로 인한 것이나 집권자의 정치행태에서 비롯되는 부정적인 현상들은 법치문화의 선진화 및 민주시민의식의 성장과 선진적인 정치문화의 조속한 정착을 통해서만 개선할 수 있는 일"이라며 "우리 대한민국에서 헌법의 규범력을 끌어 올리는 과제는 결국은 국민과 정치인의 공동과제가 아닐 수 없다"고 발제를 마무리했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