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배] "피의자가 불러주는 주민등록번호만 믿고 엉뚱한 사람 즉결심판…위자료 700만원 지급하라"
[손배] "피의자가 불러주는 주민등록번호만 믿고 엉뚱한 사람 즉결심판…위자료 700만원 지급하라"
  • 기사출고 2017.06.2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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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법] "신원확인의무 제대로 이행 안 해"
경찰관이 피의자가 불러주는 주민등록번호만 믿고 엉뚱한 사람을 즉결심판에 넘겼다. 법원은 국가가 이름을 도용당한 피해자에게 위자료 7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부산지법 민사4부(재판장 김성수 부장판사)는 3월 22일 이름을 도용당한 A씨가 손해를 배상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의 항소심(2016나44865)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국가는 7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B씨는 2015년 5월 23일 오후 6시 10분쯤 도박을 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으로부터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자, 자신의 수배사실을 숨기기 위해 A의 주민등록번호를 불러주고, 관련 서류에 A의 서명을 하는 등 A 행세를 했다. 경찰관이 B의 신분증을 확인하지 아니한 채 A에 대한 즉결심판을 청구, 부산지법은 A가 불출석한 상태에서 A를 도박죄로 벌금 5만원에 처한다는 내용의 즉결심판을 했고, 즉결심판서가 6월 8일 A에게 송달됐다. A는 이 즉결심판에 대해 정식재판을 청구해 명의 모용을 이유로 공소기각 판결을 받은 뒤 국가를 상대로 위자료 1억원의 지급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B는 이와 같은 행위 등으로 인해 구속됐고, 경찰은 A 명의의 즉결심판기록을 즉심 시스템 전산망에서 삭제했다.

이에 앞서 1984년경 A의 신분증과 학생증을 절취한 것을 기화로 A 행세를 해온 B는 1987년 부산지법으로부터 A 명의로 향정신성의약품위반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수사기관은 A의 수사자료표에 전과사실을 기재했다가, 명의가 도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2000년 이를 삭제했다. 이에 A가 소송을 내 법원에서 내려진 조정에 갈음하는 결정에 따라 국가로부터 3000만원을 지급받기도 했다.

재판부는 "경찰관이 수사에 관한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범인의 신원을 확인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전제라고 할 것이므로, 경찰관은 범인의 신원을 확인할 의무를 부담한다고 보아야 하는데, 도박죄로 B를 수사하게 된 경찰관은 B의 신분증도 확인하지 아니하고, B가 불러주는 원고의 주민등록번호만으로 B의 신원을 원고로 특정했고, 이는 신원확인의무를 제대로 이행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법령을 위반하여 피의자의 신분 확인을 소홀히 한 경찰관의 과실로 원고는 즉결심판을 받게 되었다고 봄이 상당하고, 원고가 그로 인하여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을 것임은 경험칙상 명백하므로, 피고는 원고에게 위자료 상당의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국가는 재판에서 '경찰관이 당시 B에 대한 온라인 지문조회 시스템을 이용한 지문조회를 통하여 신원확인을 했더라도, 사실상 육안으로는 지문을 구별하기 어렵고, 다른 공범들도 B의 이름을 A로 알고 있어서 회피가능성이 없었다'는 취지로 주장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그 같은 지문조회를 통한 신원확인으로 B가 원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기는 어렵고, 또한 신원확인은 지문조회 외에도 B로부터 신분증을 제출받거나 B와 함께 주민등록상 주소지까지 임의동행하여 실제 주소지인지 여부를 확인하는 등 다른 방법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이와 같은 사정만으로 회피가능성이 없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A가 즉결심판을 받게 된 경위, A가 입은 피해의 정도, 국가가 즉결심판을 바로 잡기 위하여 한 노력의 정도 등을 고려, 위자료 액수를 700만원으로 정했다.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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