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은 재판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여론은 재판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까
  • 기사출고 2013.07.12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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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법정-현실 재판 사이 상호작용 분석 세기의 재판에 담아낸 한국 실정 각주 묘미
35세의 부인 니콜을 잔인하게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배심원의 무죄평결로 혐의를 벗은 O. J. 심슨 사건은 여론이 무죄평결에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사건으로 자주 소개된다.

◇여론 법정과 현실 재판 사이의 상호작용을 예리하게 분석, 화제를 모으고 있는 《여론과 법, 정의의 다툼》
최근 권오창 변호사의 번역으로 출간된 《여론과 법, 정의의 다툼(원제목 Spinning the Law)》에 따르면, 심슨의 변호인들은 흑인이 많이 사는 LA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인종주의를 주요 재판전략 중 하나로 채택했다. 배심원 12명 중 흑인은 전체의 4분의 3인 9명. 초기 심슨의 변호를 주도한 당시 56세의 하버드 로스쿨 교수였던 사피로는 재판에서 자신을 찾아온 기자에게 인종차별적 편견을 가진 경찰관의 음모와 미리 심슨 집에다 가져다 둔 피 묻은 장갑 때문에 누명을 썼다고 주장할 계획이라고 털어놓았다. 이어 《뉴요커》에 이같은 내용의 기사가 실리자 친구에게 전화해 "끝났어, 내가 재판에서 이겼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배심원의 4분의 3이 흑인

원저자인 미 연방 검사 출신의 켄들 코피(Kendall Coffey) 변호사는 이런 일련의 기사들로 인해 일반 대중은 심슨 재판의 핵심이 인종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갈파했다. 그에 따르면, 불리한 물적 증거가 매우 많은 상황에서 심슨이 어떻게 무죄를 받을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80권 이상의 책도 인종주의와 관련된 설명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고 한다. 배심원들이 증거를 무시하고 평결했다는 것이다.

반면 검찰 측에선 유력한 증인들이 돈을 받고 언론 매체의 인터뷰에 응하면서 스스로 증인자격을 잃어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예컨대 LA 중심가에 있는 칼 가게인 로스 커틀리를 운영하는 앨런 워튼버그는 심슨이 1994년 5월 3일 15인치짜리 칼을 구매했다고 증언, 검찰이 이 칼을 사라진 살인무기로 지목했으나, 워튼버그가 직원인 호세 카마초가 《내셔널인콰이어러》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받게 된 12만 5000달러를 자신과 자신의 형제, 그리고 호세 카마초가 함께 나눌 계획이라고 경솔하게 말하는 바람에 클라크 수석검사 등 검사들은 결국 이들을 공판에서 증언시키지 않기로 결정해야 했다.

증인들의 인터뷰 장사

법의 역사, 재판의 역사만큼 여론을 통해 재판에 영향을 주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켄들에 따르면, 독배를 마시고 죽은 소크라테스 재판이 그랬고, 어머니와 함께 소형 보트를 타고 미국으로 밀입국하려다 어머니는 물에 빠져 죽고 자신만 극적으로 살아난 쿠바 소년 엘리안 곤살레스는 2000년 4월 재판이 아닌 미 행정부의 결정으로 공산권 쿠바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곤살레스 사건은 그해 11월에 실시된 미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미쳐 앨버트 코어가 아닌 조지 부시가 미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히스패닉계 주민이 많은 플로리다에선 곤살레스 사건을 겪은 유권자 대부분이 부시에 투표했기 때문.

권오창 변호사는 이와 관련, 2000년 미 대통령 선거를 앞둔 당시 민주당 행정부는 곤살레스의 본국 귀환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미국인 전체'가 배심원이 되는 여론의 법정에서는 이겼으나, 플로리다에 거주하는 중남미 출신 미국인들의 여론 법정에서는 져 대통령선거 패배로 이어졌다고 각주에서 설명했다.

미 대선까지 이어진 곤살레스 사건

여론이 재판에 미치는 영향이 갈수록 강도가 높아지고 규모가 커지고 있다. 이 책을 옮긴 권 변호사에 따르면, 인터넷과 SNS로 대표되는 현대 미디어 사회에서 여론의 법정은 한마디로 배심원 숫자가 크게 늘어났고, 판결의 속도도 과거와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빨라졌다. 이에 따라 여론의 법정과 법률의 법정 사이의 상호작용 양상이 달라지고, 사회적 관심이 높은 사건에서 여론의 법정이 법률의 법정에 미치는 영향력도 종전보다 훨씬 커지고 있다는 게 그의 의견. 권 변호사는 그러나 "하나뿐인 정의를 더욱 잘 추구하기 위해선 두 개의 법정 사이의 건전한 긴장과 원활한 소통이 필요하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세기의 사건 및 최근 유명 재판에 대한 분석과 함께 옮긴이 주에서 미국의 법제도에 견준 한국의 실정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곁들이고 있는 것도 이 책의 묘미 중 하나. 책의 뒷부분에 소개된, 전통적 언론매체와 유튜브 등 인터넷으로 나눠 접근한 여론 대응전략은 실용적 가치를 더하고 있다.

서울대 로스쿨 한인섭 교수는 "여론의 법정과 현실재판 사이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이보다 흥미진진하게 풀어낸 책을 본 적이 없다"며, "앞으로 법률가들은 현실의 법정 못지않게, 지극히 가변적인 여론의 법정에도 신경써야 함을 일깨운다"고 평가했다.

김진원 기자(jwkim@lega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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