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
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
  • 기사출고 2012.07.03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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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 김병로, 이인 변호사 항일 재판투쟁 조명한인섭 교수, "민중의 권익옹호 헌신 실천 일관"
'조선총독부 법정에서 일제의 법률로 독립운동가를 변론한다는 것은 모순 아닐까.'

◇식민지법정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의 한인섭 교수가 이런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열렬한 항일변론으로 응답한 허헌, 김병로, 이인 변호사를 찾아내 일제하의 재판투쟁과 항일변론의 실상을 새롭게 조명했다.

최근《식민지 법정에서 독립을 변론하다》를 펴낸 한 교수에 따르면, 일제하에 활동한 비타협적인 민족운동가들은 변호사 역시 일본법률론자라 하여 아예 변호사를 사절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허헌, 김병로, 이인 변호사 등 항일변호사들은 일제의 법정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다양한 방법을 개발해냈다. 형사절차의 맹점을 매섭게 지적하고, 고문수사의 실제를 여실히 폭로하는가 하면 현지조사를 통해 총독부를 고발하기도 했다.

공소불수리론 재판부 수용

항일변호사의 존재를 뚜렷이 각인시킨 첫 사건은 3.1운동 주역들에 대한 재판. 허헌은 경성지방법원이 사건을 다룰 법적 관할이 없다는 공소불수리론을 제기해 재판부가 받아들임으로써 엄청난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검사가 상소하여 공소불수리는 파기되고 전원에 대해 유죄판결은 내려졌지만, 기세가 꺾인 일제 법원은 예상보다 훨씬 경미한 처벌을 과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한 교수는 "일제하의 변호사는 경찰도 한수 접고 대할 정도로 상대적인 특권을 누렸으나, 이들 3명의 변호사는 그런 지위를 피고인의 권리투쟁, 실지조사 등을 통한 사회여론의 조성, 신간회와 같은 사회운동에 중심적 역할을 하는 방식 등으로 적절히 활용했다"고 소개했다. 이들은 또 변호사의 수입을 개인적 치부를 위해 쓰지 않고, 전국 각처의 법정변론 및 피고인의 보조, 그리고 사회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기꺼이 내놓았다.

당연히 이들에겐 일제의 탄압이 뒤따랐다. 1930년대 초 허헌은 민중대회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으며 변호사자격을 박탈당했고, 이인에 대해서는 수원고농사건으로, 김병로에 대하여는 토지분쟁소송에서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각각 정직 6개월의 처분을 내렸다.

변호사자격 제재

40년대 초반 즉, 일제말기의 전시동원체제하에서 이들은 사상사건을 다룰 지정변호사 명단에서 아예 제외되었다. 허헌은 단파방송사건에 연루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이인은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역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김병로는 경성에 은거하면서 일제의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다.

김병로가 정부수립 이후 초대 대법장으로 사법부의 초석을 닦고, 이인이 초대 법무부장관이 되어 법무행정의 기초를 다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한 교수는 "이들이 흔히 '사상변호사' '무료변호사' '좌경변호사'로 불리곤 했으나 변호사는 피고인의 권익 뿐 아니라 민중의 권익옹호에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을 실천하는 삶으로 일관했다"고 기렸다. 경인문화사, 684쪽.

이은재 기자(eunjae@lega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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